딸은 학교에 가고, 부모는 일터에 간다. 초등학교 마친 나이쯤 되면 딸들은 어지간히 자기 앞가림도 하고, 제법 부모 생활 태도에 잔소리도 하고, 밥을 챙겨 먹기도 하니 부모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제 시간에 집에 꼬박꼬박 들어와 있기만 하다면.

그런데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딸 가진 부모는 애가 마른다. 딸한테 닥칠 지도 모르는 못된 사건사고 소식이 넘치는 세상이니 험한 일 당한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건 자식 사랑 유별나서가 아니다.

이정호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은 이런 걱정이 현실로 닥쳤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다룬 영화다. 아내가 세상 뜨고 보니 어느새 딸은 자라 아이가 아니라 청소년이 되어있고, 오래 앓던 아내 병수발 하다 어려워진 형편에 다세대주택 셋집 살림 꾸리는 노동자 아빠 상현(정재영)은 고달프다.

한참 어린 관리자에게 시달리고, 물량 출고 맞추느라 걸핏하면 야근이고, 밤늦게 퇴근해 돌아오면 집에서는 딸이 마트 가자고 약속 잡아놓고 기다리다 TV 켠 채로 소파에 잠들어 있다. 자는 딸 수진(이수빈)을 깨워 말 한 마디 붙여보려 했더니 약속 안 지켰다고 뾰로통해 아침에 밥도 안 먹고 후다닥 학교 간다고 나가버린다. 영 속상한 판인데 또 야근이란다.

사정이 또 그렇다고 딸한테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려다 일에 치어 넘기고 늦게서야 돌아오는 퇴근길에 하필 비가 쏟아진다. 엄마처럼 살뜰히 챙겨주지도 못하는 주변이라 밤참거리 사들고 돌아와 보니 캄캄하다. 잠들어 있나보다 싶었는데 불 켜고 보니 딸이 없다. 토라져서 친구집에라도 간 걸까, 딸 방 안은 아침에 허둥지둥 학교 가느라 어수선한 그대로고, 연락도 안되고.

불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실종자 전단지 붙여놓고 공장에 출근해 일하면서도 전화연락 하나에 온 신경이 쓰이는 아빠에게 걸려온 전화. 아니라고, 잘못 연락한 거라고, 확인할 필요 없다고 뻗대도 경찰이 등 떠밀어 보여주는 건 상처투성이로 세상 떠난 딸의 주검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경찰서를 떠나지 못하는 아빠에게 청소년 범죄 강압수사로 내사를 받고 있는 형사 억관(이성민)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돌아가란다. 철거니 개발이니 뒤숭숭한 변두리 비어있는 목욕탕 건물이 동네 불량청소년들 아지트가 되어있었고, 거기서 발견된 딸은 강제 투약에 성폭행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분하고 애통한 마음에 발길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현에게 누군가 문자로 범인 이름이며 주소를 알려준다.

여기서부터 <방황하는 칼날>은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범죄 스릴러 장르라기보다 생활 드라마처럼 상현의 일터, 오가는 거리며 지하철 주변을 보여주더니 이정호 감독은 이 지극히 평범한 아빠를 휙 돌게 만든다. 상현은 바로 앞에 있는 형사에게 단서가 될 만한 제보 문자를 받았다고 알리지도 않고, 누가 문자를 보냈을까 따져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메시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찾아간다.

자기네나 사는 형편 별다를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집에서 딸 또래 남학생 컴퓨터에서 찾아낸 건 딸이 당한 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영상. 눈 돌아가고 속 뒤집힌 상현이 그 아이를 패 죽이는 순간, 이제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그런데 관객들 눈에 이런 반전이, 캐릭터의 폭주가 전혀 엉뚱하지 않다. 경찰한테 말해서 뭐해, 범인 잡아들이면 또 뭐해, 그 부모 만나면, 수사해서 진실이 밝혀지면, 재판해서 처벌하면, 그러면 또 뭐해, 이런 암묵적 동의가 관객들 사이에 짙게 드리워있다.

청소년 범죄든, 성범죄든, 가정폭력이든, 아동학대든, 학교 폭력이든 생명과 일상에 대한 온갖 범죄에 대한 법집행 현실과 국민들이 느끼는 법 감정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표면이다. 처벌을 강화하고, 형량을 높인다고 해서 이런 범죄가 줄어들리라는 기대는 무책임하다.

사실 아이들이 밝을 때 학교 마치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야간학습이니, 보충수업이니, 학원이니 늦도록 시달리기 때문이다. 아이만 늦어지는 게 아니라 부모도 늦어지는 건 칼퇴근이 뭔지 모르게 일해야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노동현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식이 바깥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다니는지 단속 못하고, 막상 어떤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게 밝혀져도 내 자식만 피해 안가면 된다는 이기적인 부모들 속셈도 한몫한다.

딸을 죽인 범죄자들을 아버지가 직접 심판하려는 상황에 대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이 소년범죄의 심각성과 법 개선에 집중한다면, 이정호 감독의 영화는 그 상황에서 각각의 인물들을 흔들어 보이며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도록 한다. 사적인 복수는 어차피 탄알없는 총을 겨누는 것처럼 공허한 일이라는 듯.

<방황하는 칼날>은 공권력에 실망한 아버지가 범죄와 관련된 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기본 이야기가 같은 헐리웃 영화 <테이큰>처럼 영웅적인 건 고사하고, <모범시민>처럼 볼거리 화려하지도, 연기력보다 마케팅 염두에 두고 아이돌 캐스팅해서 사회적 관계망을 짚어보기보다 등장인물 움직임만 이어간 <돈 크라이 마미>처럼 자극적이지도 않다. 일터나 거리 뿐 아니라 경찰서며 범죄현장까지 뉴스 화면처럼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사람이 사는 곳은 그곳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든 범죄현장이든 스키리조트든 다 마찬가지라는 듯.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 하얀 눈밭에 서있는 자작나무숲 정도가 숨져간 소녀를 애도하듯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발 디디고 살아가야하는 곳은 사람 세상이고, 그러니 이정호 감독은 아무리 처절해도 지켜보기는 하자는 마음을 억관의 등에 실어 보인다. 그런데 뒷모습이 믿음직하기보다 딱해 보이는 건 그 책임이 어느 개인 하나의 사명감만으로 질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서는 데 한 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귀에 꽂혔다. “그런데 내 아이가 그런 범죄로 걸려 들어간다고 해도, 나도 그 부모들처럼 할 것 같아. 당신은?” “어쩔 수 없지. 그게 부모잖아.” 영화보다 잔혹한 현실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이 무심함이 소녀를 죽이고, 빈 총을 겨누게 만들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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