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금수공화국(禽獸共和國)

봉하노송(烽下老松)의 절명 ⑥

만수는 눈을 떴다. 옆에 앉아서 졸고 있던 정기가 사라진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기가 옆에 없었다. 벤치 아래에 내려놓았던 그 벽돌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정기는 벽돌을 집어 들고 어디로 떠난 것 같았다.

“제기랄! 이 진상이 어딜 간 거여?”

오른쪽 무릎을 힘겹게 세우며 벤치에서 일어난 만수는 절뚝거리며 정기를 찾아 나섰다. 우선 동신당 안을 살펴보았다. 분향소 안에 정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경찰관들이 도망쳤던 경찰차 뒤편으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도 정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민중현 신부가 걸어갔던 동신당 건물 오른쪽으로 가보았다. 건물 뒤편에 세워져 있는 민 신부의 꽃마차 안에서도 정기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이 화상이 어딜 갔지?”

만수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정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동신당 출입구 맞은 편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만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역시 이번에도 정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주망태가 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도 흉기나 다름없는 벽돌까지 들고서 말이다.

만수는 등을 타고 목덜미를 거쳐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 불안감에 사로 잡혔다.

정기는 2007년 청와대 앞 분신자살 시도 이후 많이 변했다. 오늘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지만 그의 기억력은 예전 같지 않다. 이성도 또렷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잔뜩 술에 취해 벽돌을 들고 종적을 감춰 버렸으니 이거 참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수는 짜증이 났다. 정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기보다는 박복한 자신의 인생에 짜증이 났다. 왜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일까. 왜 자기 주변엔 거들어주는 사람보다는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일까.

만수는 기가 막혔다. 인덕이 없어도 어느 정도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미는 참인데, 순간 무엇인가가 뒤통수를 ‘쾅!’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만수는 급히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5분전이었다.

“햐! 이거 정말 미치겠네!”

늦었다. 오늘 오후 1시에 동학 115주년 기념 학술행사 준비 모임을 종로에서 열기로 돼 있었다. 두 달 전에 정해진 약속인데,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만수는 택시를 잡으려고 부랴부랴 벤치 뒤편 도로로 뛰어내려갔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미 약속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모임 참가자 한 명에게 ‘좀 늦게 도착하겠다’는 문자를 전송한 만수는 한참 뒤에야 어렵게 택시를 잡았다.

“저기 기사님! 수운회관 좀 갑시다!”

동학은 조선말인 1860년에 수운(水雲)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종교다.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종로구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수운회관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1921년 준공된 이후 천도교의 총본산이자 요람 역할을 해 왔다.

수운회관 옆 커피숍에서 열기로 한 동학 115주년 기념 학술행사 준비 모임에 참석하려고 만수는 직장이 있는 거제도에서 어제 오후 서울로 올라왔다.

지난 2004년 한 여름 밤, 부안읍과 격포항 사이의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만수의 아내 송지숙은 부안군 백산면(白山面) 용계리(龍溪里) 출신이다.

용계리는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는 말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동학혁명의 성지 백산(白山)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출신인 지숙은 1958년 개띠인 만수보다 세 살 아래인 1961년생 소띠였다.

백산면은 원래 고부군(古阜郡) 땅이었다. 동학혁명 20주년인 1914년에 일제는 고부군을 없애 버렸다. 이 때 백산면은 부안군에 편입됐다.

백산면의 ‘백산’이라는 지명은 용계리 서북 방향에 위치한 해발 47m 높이의 야트막한 야산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 온다. 이 산의 이름을 ‘백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흰색 화강암 바위가 많아 산이 하얗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화도 있다.

김만수는 송지숙과 연애 시절부터 백산에 자주 올랐다. 그미는 살아생전에 마을 뒷동산인 백산에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올랐을 것이다. 만수가 이날까지 백산에 오른 횟수는 아마도 백회는 될 것이다.

백산에 오르는 등산로 초입엔 사적 제409호 백산성(白山城)을 안내하는 간판이 서 있다. 주차장 입구 왼편에 서 있는 이 백산성 안내 간판에는 ‘동진강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야산에 위치한 백산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성지’라고 적혀 있다. 또한 ‘고종 31년인 1894년 3월, 동학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혁명의 불길을 당겼던 곳’이라고 씌어 있다.

산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야트막한 백산. 다른 고장에 가면 이 정도 높이의 야산은 산으로 취급하지도 않겠지만 지평선의 고장인 김제시 인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높이 47m에 불과한 언덕이나 다를 바 없지만, 이곳 평야지대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새이고, 군사적 요충지였다.

분명 눈에 보이는 백산의 높이는 매우 낮다. 하지만 가슴으로 어림하는 그 높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백산의 높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이 낮은 야산에 갑오농민혁명의 성지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덧붙이게 되면 백산은 한반도의 그 어떤 명산 못지않은 높이와 무게를 지니게 된다.

만수가 백산에 난생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87년 4월5일 식목일 오후였다. 군사독재의 마침표를 찍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트게 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총각 만수는 처녀 지숙의 손을 잡고 백산에 올랐다.

“오빠! 왜 말이 없어?”

“글쎄! 왠지 무섭고 떨리고 참 기분이 묘하네.”

“덩치 값 좀 하세요!”

“그게 뭔 소리니?”

“아까 점심 때 우리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자랑을 했지? 비록 다린 좀 절고 있습니다만 힘이 장사고 무술의 달인이라, 바다에 빠지면 식인상어 쯤은 주먹 한방으로 기절 시킬 수 있고, 산에서 호랑일 만나도 걱정이 없는데, 군대서 익힌 특공무술로 호랑이 눈깔을 눈 깜짝할 사이에 빼낼 수 있다고 했어 안했어?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남자가 뭐? 이깟 야산에 오르면서 겁이 나서 무섭고 떨린다구?”

“모르겠어.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말야, 괜히 무섭고 떨려! 저저 산꼭대기서 눈을 부릅뜬 녹두장군이 날 부르는 것 같기도 하구...저기 저 무덤 중엔 아무래도 동학혁명 때 돌아가신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있잖아. 저기 대나무 숲에서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아 소름이 끼치는데, 글쎄, 넌 안 들리니? 아까부터 내 귀엔 귀신 울음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은데..”

“걱정이다, 걱정!”

“뭐가 걱정이라는거야?”

“이런 겁쟁이 남자하고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지 그게 걱정이라구!”

“갈라설까?”

“안 그래도 마악 그 생각을 하던 참인데, 그거 참 잘 됐네! 기왕 말이 나온 거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말이야, 우리 당장 쫑을 내지 뭐! 자, 어서 새끼손가락 걸어!”

“후회 할 껀데!”

“내가 후회를 할꺼라구?”

“그럼! 나 같은 남자 만나기가 쉬울 것 같니?”

“그렇겠지. 그렇게 겁 많고, 버르장머리 없고, 외골수고, 찢어지게 가난한 섬놈에다 다리까지 저는 병신인데 만나기가 어디 쉬울까?”

“뭐? 섬놈에다 다리까지 저는 벼엉신?”

“그럼 아냐?”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너 정말 이럴꺼야?”

“내가 뭘! 어차피 쫑 낼 건데, 여태 가슴에 담아 뒀던 말들을 오늘 죄다 털어 놓으면 안 돼?”

“뭐 그거야 니 맘대로 하세요만, 어째 말하는 싸가지가 좀 그렇지 않니, 응?”

“이판사판인데 뭐 싸가질 따지고 그래! 아, 뭐해! 신체적 장애인 김만수와 정신적 장애인 송지숙 두 사람, 진달래꽃 개나리꽃 그리고 또 뭐냐 아 그래 벚꽃까지 흐드러지게 핀 이 동학혁명의 성지 백산 정상에서 역사적인 이별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걸자는데, 아니 왜 이래? 뭣 땜에 망설이셔!”

“잠시 생각을 좀 해보자!”

“무슨 생각?”

“고집불통이고, 당돌하고, 천방지축인데다 싸가지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불량처녀와 헤어지는 것이 이내 인생에 보탬이 될지, 아니면 손해가 날지, 한 번 계산을 좀 해볼테니까 시간을 좀 주시지!”

“그래? 저저 서산에 해 떨어질라면 한 두어 시간 남은 것 같은데, 저기 보이지, 육각정! 저기 올라가서 고민을 한번 해보시지! 자, 그럼 나 먼저 내려간다!”

“야, 지숙아! 지숙아!...지숙아!...”

그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백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미가 떠난 뒤 만수는 선머슴 같으면서도 여장부가 틀림없는 그미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런 다음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백산 정상 구석구석의 속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산 정상에 서니 사방이 수십 리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진강이 가까이 흐르고 있고,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외부 세력이 접근해 와도 이곳 정상에서는 금방 알아 챌 수 있을 듯 했다.

저 멀리 동남쪽의 산 너머가 전북 정읍시 고부면인 것 같았다. 서울 K상고 동기 동창인 이수현의 고향이기도 한 고부면은 동학혁명의 시발지다. 조선 고종 29년인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894년 초, 고부에서는 당시 동학의 고부 접주였던 전봉준을 선봉장으로 삼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폐정 개혁을 외치며 일어났다. 농민군은 다음 달 고부 관아를 공격해서 불법 수탈 된 수세미를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해산했다.

이후 관이 고부 농민봉기의 주모자 및 가담자를 수색해서 채포하려고 하자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茂長縣)에 모였다.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며 재봉기에 나섰다. 그 뒤 이곳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고 군사적인 대오를 갖추어 중앙정부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이곳 백산에 집결했을 때 그 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 온다. 인근 지역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 온 농민군이 하도 많아서 백산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손에 죽창을 들고, 어깨에 괭이를 걸친 흰옷 차림의 농민군들이 앉게 되면 백산은 죽창이 가득한 죽산이 되었다. 반면 흰옷을 입은 농민군들이 일어서면 백산은 한자(漢字) 지명 그대로 흰색의 산인 백산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이러한 백산봉기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1차 봉기 후 흩어진 동학농민군이 재집결해서 전열을 정비하고 그 세력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학군이 첫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열을 정비했던 백산성. 이 백산성이 있는 백산에 처음 오르는 만수에게 지숙은 ‘동학혁명 창의문’의 한 대목을 쪽지에 메모해 주었다.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국사는 젖혀 놓고, 감투와 국록만 도둑질하며 참된 정의는 아첨배의 농간에 가려지고, 바른말 하는 이는 역적으로 몰아세우니, 안으로는 조정을 도울 기둥이 없고, 밖으로는 탐관오리만이 와글거리고 있다. 경향 간에 벼슬아치들은 도둑질로 일을 삼고 재화가 국고에 들어가기는커녕, 가로채는 자의 배만 불리고, 교만함과 음탕함이 거침새가 없더라’

전봉준 등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을 널리 호소하는 글인 창의문을 작성해서 발표한 것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외세를 내쫓으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이에 백성들은 적극 동참했고, 세상의 온갖 악을 함께 척결하려고 분연히 일어섰다. 우선은 먹고 사는 생존이 절박했겠지만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는 역사적인 소명에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만수는 백산 정상에서 ‘동학혁명 창의문’을 읽고 또 읽어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은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할 때는 그 동기나 상황이 엇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민중은 그 어느 때이고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일반’이라는 판단이 확고하게 서게 되면 목숨을 건 봉기를 결코 거부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빠! 안 내려 갈꺼야, 응?”

먼저 내려가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던 지숙이 백산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만수는 담배를 꺼내 물며 일부러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했다. 그러자 애가 탄 그미는 만수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육모정 근처로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만수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 담배를 오른 손으로 낚아채더니 풀밭에 내동댕이쳤다. 운동화발로 짓이겨 담뱃불을 꺼버렸다.

절반도 못 피운 담배를 그미가 그렇게 꺼버리자 만수는 화가 치밀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그미를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한마디 악담을 퍼붓고 싶었지만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그미의 맑고 깨끗한 큰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만 생각을 고쳐 먹었다.

“정말 이럴꺼야? 정말 헤어질꺼냐구?”

그미는 만수를 향해 다짜고짜 이렇게 따지고 물었다. 그러더니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시는 만나지 말 것을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는 몸짓이었다. 만수는 잠시 망설였다.

“아 얼른 쫑을 내!...뭘 망설여, 이만 쫑을 내잔 말야!”

그미는 울부짖었다. 당돌하고 강해 보이지만 그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너른 호남평야 저 건너의 서산 위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데, 그 붉은 노을이 가득 담긴 듯한 그미의 눈망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태우려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만수는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고 버텼다. 재작년 서울에서 고등학교 동창 이수현의 소개로 그미를 처음 만난 이후, 약 2년 정도 사귀면서 겪었던 여러차례의 사랑싸움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사랑싸움은 늘 이렇게 결말을 맺곤 했다. 먼저 토라져서 이별을 고하는 쪽은 그미였다. 끝까지 버티며 싸움에서 승리한 뒤 끝내 상대의 무릎을 꿇리는 쪽은 대체로 만수였다.

늘 그랬지만 그미는 급하고 당돌한 성격 때문에 먼저 별리의 강을 건너는 편이었다. 백기도 달지 않고, 돛대도 없고 사공도 없이 홀로 상앗대만 이용해서 애증의 강을 무시로 건너가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그미는 제 풀에 제가 꺾여 나룻배에 가득 눈물을 싣고 다시 강을 건너오곤 했다.

그미가 용감하게 배를 띄우고 떠났던 그 강나루에 울부짖으며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제아무리 길어도 채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동진강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천생 여자여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미는 늘상 그런 식으로 필사적인 사랑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반면, 남자이자 섬 출신인 만수의 대응 방식은 정반대였다. 가는 여자 잡지 않고, 오는 여자 막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갈 테면 가고, 올 테면 오라는 막무가내식 배짱으로 끊임없이 거듭되는 만남과 이별의 줄다리기를 이어왔다.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틈틈이 콧물까지 훔치고 있는 그미의 머리 위엔 꽃샘바람이 이리저리 몰고 다니다 내려 놓은 백산성의 꽃비가 뚝뚝 떨어졌다. 꽃샘바람은 벌써 땅에 떨어져 시커멓게 색이 바랜 백산성의 흰색 목련 꽃잎까지 그미의 발아래에다 옮겨다 놓는 중이었다. 점점 나이가 차서 노처녀 소리를 듣게 생겼는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콧대만 세우려는 그미에게 화무십일홍의 섭리를 일깨워 주려는 듯.

만수는 자신이 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그미의 평상시 모습 보다는 이렇게 화가 나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따지고 들 때, 그리고 분하고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악을 쓰며 울부짖을 때, 그미가 더 사랑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미가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만수를 노려보면서 강렬한 사랑을 갈망할 때 묘한 성적 매력마저 느끼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만수는 그미의 입술을 기습적으로 덮쳤다. 그와 동시에 그미의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꼬옥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그미는 금세 순한 양이 되곤 했다. 그런데 난생 처음 오른 동학혁명의 성지인 백산에서, 그것도 예비 처갓집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첫사랑의 불장난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지 퍽이나 곤혹스러웠다. 울며불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째려보면서 이별의 손도장을 어서 찍자고 새끼손가락을 들이대고 있는 그미를 어떻게 달래야 될지 만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만수는 그미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보통 키에 가녀린 몸매인 그미를 만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쳤다. ‘빨리 내려 달라’고 발버둥치는 그미를 만수는 어깨에 짊어지고 뒤뚱뒤뚱 백산 정상에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꽃샘추위가 매섭던 그해 봄 식목일 초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새벽이 오기까지 스물일곱 살 처녀 송지숙은 서른 살 총각 만수에게 갖가지 백산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거의 다 허물어진 백산성 성벽에 등을 기댄 채 그 옛날엔 수십 그루가 있었다는 백산의 금강송 얘기도 들려주었다. 처갓집 골방 창호지 봉창에 꼭두새벽 쯤 쏟아져 내렸던 별똥별의 잔영이 비칠 때는 백산성 주변에 있었다는 두 개의 조그만 사찰 얘기도 전해 주었다.

만수와 지숙은 이듬해인 1988년 춘삼월, 부안 낭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전까지 만수는 수십 차례 그미의 손을 잡고 백산에 올라 데이트를 즐겼다. 용계리 처갓집에 들를 때면 으레 데이트 코스를 마을 뒷산인 백산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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