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라는 공간을 거쳐 왔거나 거치고 있는 만큼 이 문제에 대해 가깝게 이입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죽음으로 이어진 극단적 사례에 대해서 혀를 차고 지나가거나 적당히 전인교육 같은 것을 한번 부르짖고는 대충 넘어가곤 한다. 가끔 교사의 권위니 가정의 붕괴니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이니 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은 지속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상황의 체계적 개선이 더딘 것은 바로 학교내 집단 괴롭힘을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 한정하며 접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회에서든 권력의 서열은 발생한다 - 처음에는 개체의 능력 격차로, 나중에는 축적된 밑천의 효과로 말이다.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한번 생겨난 권력의 서열은 공고하며, 정교한 상호 견제의 장치를 심어 넣기 힘들다. 그리고 학생 사회는 신체적 강함이나 돈의 영향력 등이 날 것으로 작용하는 원시적 권력 서열이 있고, 사회 관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또래집단이라는 속성 때문에 여느 섬마을 노예 사건의 공간 못지 않게 폐쇄적인 구석이 많다. 골목대장 행세를 하는 불량 청소년 한 둘 쯤 정학시킨다고 한들, 폐쇄집단을 움직이는 권력 틀이 그대로라면 그 빈자리는 빠르게 다시 채워지고는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괴롭힘의 조직화가 생겨날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집단 괴롭힘은 행사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며, 뿌리 뽑는 것이 아니라 완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고작이다. 선진적 협동 교육이 확실한 해결책이라면 스웨덴에서 [렛미인] 같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었을까.
집단 괴롭힘을 완화하기 위해서 한 쪽으로 필요한 것은 학생 사회의 폐쇄성을 계속 깨는 것이다(특히 독립적 신고 및 전문 대처 체계보다 “학교 안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처리하는 것”을 중시하는 교육 행정이 개조 대상이다). 그런데 동시에 모든 대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집단 괴롭힘은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공유다.
CCTV 해상도를 높이는 것도 뭐 한쪽의 방향이겠지만, 집단 괴롭힘이라고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들에 대해 의식적으로 훨씬 역치를 낮춰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