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언론도 복지원 피해자들과 직접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아무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아, 결국 많은 국민들은 복지원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1984년 아홉 살 소년 종선은 작은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간다. 그로부터 3년. 그는 지옥을 경험한다.

멀쩡한 사람들이 강간과 성폭행, 구타, 고문, 기합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되고 불구자가 됐다. 사망하고 암매장되고 사체로 팔려나갔다. 정부에서는 은폐했고 어떤 방송매체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노력하지 않았다.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 소금 뿌린 김치, 일명 ‘똥국’으로 불린 시래기 된장국. 1년 내내 변하지 않는 식단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전두환 정권은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부산 시내의 거지나 노숙자, 부랑인들을 한 곳에 잡아 가두라는 지시를 내린다. 보건복지부와 부산시, 경찰서는 형제복지원에 협조했고 복지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한다. 매년 20여억 원의 돈이 지원됐다. 예산은 사람 수대로 계산됐다. 복지원이 멀쩡한 사람들을 복지원에 가둔 이유다.

   
▲ 한종선씨는 28년 전 기억을 더듬어 글과 그림으로 당시 실상을 드러냈다. ⓒ한종선

원생들은 매주 일요일 복지원에 있는 교회에 가서 원장의 설교를 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곳에 구원은 없었다. 복지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교회 옆에는 하나 둘 새로 만들어진 무덤이 늘어갔다.

28년이 지난 지금, 37세의 한종선씨는 지금도 추위에 대한 공포심이 유별나다. 복지원에 있을 때 한겨울 열을 맞춰 부동의 자세를 취하는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여름엔 일사병으로 쓰러지고, 한겨울에는 온 몸이 꽝꽝 얼어 말 그대로 동태가 되고 했다”고 회상했다.

형제복지원은 3500여명의 원생이 수용된 국내 가장 큰 사회복지시설 중 하나였다. 아이들은 파출소에서 복지원으로 넘겨졌고, 정부는 예산을 지원했다. 동아일보의 87년 2월 2일자 <부랑인 선도 악용한 생지옥> 기사에 따르면 85년 복지원에 수용된 3948명 중 3755명은 경찰이, 193명은 구청이 수용을 의뢰했다.

복지원에서는 폭력이 일상화됐고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복지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지옥을 유지한 것은 언론의 직무유기, 국가 공권력이었다.

87년 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513명이 사망했다. 멀쩡한 사람이 맞거나 고문·성폭행으로 정신이상자나 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원장은 실형 2년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9세 이후로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와 누나는 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나는 사회에서 이용만 당하다 전과자가 되었다. 아무도 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묻어둔 관계로, 우리는 아무런 피해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정신병원과 홀로 집안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 한종선씨의 유일한 유년 사진. 사진 아래 번호는 그가 복지원에 입소한 후 부여받은 일련번호다. ⓒ문주

87년 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당시 울산 지청 김용원 검사는 수사 초기 많은 것을 밝혀냈다. 인권유린에 대해 수사를 해야 했지만 박종철 고문사건으로 시국이 어지럽다는 이유로 상부로부터 수사 협조를 받지 못했다. 사건은 축소 은폐됐다. 복지원 이야기는 김 검사의 회고록 <브레이크 없는 벤츠>(1993)에도 나온다. 

검사는 공금횡령이 11억 원 이상이라고 품신했지만 상부인 부산지검은 공소 변경으로 6억 원 미만으로 바뀌었다. 1차 수사 때 구형된 징역 15년은 대법원에서는 2년 6개월이 됐다. 피해자들은 한 푼의 보상금도 없이 버려졌다. 원장은 지금도 부산에서 엄청난 재력가로 살고 있다. 대안학교의 대표이사직까지 맡고 있다.

“가해자들은 불법적으로 모은 재산 중 1퍼센트도 안 되는 돈을 교회 단체나 장학금 등으로 기부하면 어느새 사회적으로 좋은 위인이 된다. 반면에 피해자들은 대한민국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남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어두운 방구석에서 자신을 숨겨 가며 살아간다.”

한씨는 “그런 일들 덕분에 이 정도 발전할 수 있었지, 안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그만큼 발전을 이루었으면 이제 잘못된 것에 대해 반성도 하고 대한민국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 누구도 복지원 사건에 책임지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이런 일들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로 숨기고, 언론은 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음에도 숨기고,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무관심해서 복지원 사건은 결국 묻힌 것이다.”

이 사건은 한종선씨의 국회 앞 1인 시위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올해 여름 국회 앞 24시간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그에게 1인 시위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과정 중 했던 최초의 일’이었다. 가끔 기자들도 명함을 주고 취재해보겠다며 한씨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답은 언제나 “시효가 너무 지났다”는 것이었다.

   
▲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하는 한종선씨. ⓒ박진순

그런 그에게 직접 그의 언어와 기억으로 글쓰기를 할 것을 제안한 사람은 문화연구자이자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였다. 전 교수는 국회 앞에서 한종선씨를 조우한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될 수 없는 이미지’ 그 자체였다. 조우의 순간에 나는 이처럼 그가 복지원 체험의 결정체, 수용소 사태를 집약한 핵심 단자, 말해지지 않은 한국현대사의 드문 증인임을 직감했다.”

전 교수는 이 글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한종선씨의 무의식적인 것까지도 언어로 표출하도록 만드는 편집자 역할과 교사로서의 자문 역을 맡았다. <살아남은 아이>는 새로운 저널리즘 글쓰기 시도이기도 하다.

한씨는 ‘사회복지시설 피해자 1기’인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하다 나온 사람들이 똑같은 과정을 밟아간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사회에 나와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욱하는 순간 사고라도 치면 복지원 사건은 영원히 묻힐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복지원 사건이 해결되어야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대한민국 어딘가에 그가 있었던 복지원과 같은 곳이 또 있을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상처받은 이에게 동정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예방을 위한 대책이 먼저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과거는 잊고 미래를 향해 살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미래에서 과거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겠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고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아이 /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 문주 펴냄

 

   
▲ 살아남은 아이 /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 문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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