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고문 생존자들이 만든 단체 ‘진실의 힘’은 진실의 힘 인권상 2회 수상자로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선정했다. 시상식에서 그의 아내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은 “아마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이 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외의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근태는 늘 미안해했습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고문당하고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분이 너무나 많은데 그분들에 비해 김근태 자신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근태가 당한 고문의 실상은 최근 개봉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드러났다. 김근태는 1985년 12월 19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첫 공판을 받는다. 그는 우리나라 공판 사상 처음으로 피고소인 자격으로 모두진술 제도를 활용해 고문을 당한 사실을 고발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라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김근태는 1987년 감옥에서 부인과 공동으로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다. 로버트케네디 인권센터의 대표 케리 케네디는 인권상을 수여한 이유에 대해 언론 인터뷰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사람”이라며 “그렇게 군사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87년, 그리고 2012년 시상식에 모두 참석하지 못했다.
 

최근 출간된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의 저자인 최상명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 소장(우석대 행정학과 교수)은 학생운동 시절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과 조우했고, 외환위기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제 정책을 고민하는 파트너였다. 또 한반도재단 설립과 운영에 참여한 정치 후배이기도 하다.

최 소장은 책에서 “민주투사 김근태는 고문과 탄압, 수배와 도피 속에서 외롭게 싸웠고, 정치인 김근태는 무관심과 무시 속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이 책은 <남영동 1985>의 민주투사 시절 이후 정치인 김근태의 삶이 담겨 있다. 김근태는 정치에 입문해 97년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제를 주장했고, 2002년 3월 정치자금 양심 고백을 단행했다. 그것도 자신이 제기한 국민경선제에 직접 후보로 나서 경선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근태는 당시 양심 고백을 한 이유에 대해 “초유의 정치 실험인 국민경선제가 국민 동원 경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숙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3년 7월 정치자금 양심 고백 재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치자금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며 국민적 요구가 됐습니다. 감히 말씀드리면 저의 양심 고백이 이러한 흐름에 작지만 의미 있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위선’과 동거하면서 책임 있는 정치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김근태는 느리다. 그런데 김근태의 느림은 늘 훗날 역사적인 진보임이 밝혀진다"며 "1997년 최초로 제기한 국민경선제도 그랬고, 정치자금 양심 고백도 정치 개혁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김근태는 경제민주주의를 위해 정부가 부동산 가격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한 첫 걸음으로 공공주택 분양 원가 공개를 추진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에는 참여정부가 경기 진작을 위해 국민연금 기금 사용을 추진하자 “애초의 취지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하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는 영리의료법인 허용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 책의 부제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시대정신’이다. 저자는 지금 김근태에게 시대정신을 묻는다면 정권 교체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그 정권은 반드시 신자유주의로부터 국민을 지키겠다는 국가경영 철학을 실천해야 한다”며 “국가경영 철학을 국민과 함께 설계할 때만 의미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여름 김근태는 ‘제2차 민주대연합’을 시대적 과제로 여기고 국민제안문을 작성했다. 이 제안문은 건강 악화로 발표되지는 못했다. 저자는 “김근태의 제2차 민주대연합 주장은 민주당에서 환대받지 못했다”며 “1차 민주대연합의 과제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2차 민주대연합의 과제는 ‘반신자유주의 국가 시스템 구축’이라는 시대정신에 방점을 뒀는데, 이를 위해 김근태는 무엇보다 먼저 민주정부 10년을 성찰하고 반성의 고백이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2년을 점령하라”고 말했던 김근태는 죽어서도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 최상명 지음 / 푸른숲 펴냄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