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대결하던 그리스의 비극은 이제 찾을 수 없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문학과 현대 대중문화의 소재는 ‘의식주’와 ‘연애’이고,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또 플롯이 없는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이다. 마치 그리스비극의 몰락기에 등장한 에우리피데스의 극처럼 현대의 문학은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윤소영 한신대 교수가 펴낸 <문학 비판>은 문화의 문제설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추적한다. 윤 교수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에서 문학의 기원은 서양이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시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비극은 서양문학의 ‘달성 불가능한 표준’이다. 칼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과 희극은 모두 가상의 재현으로서 ‘모방(mimesis)’이다. 비극은 ‘더 나은 인간’의 행위이고, 희극은 그 반대다. 특히 비극은 감정이입과 감정치료(카타르시스)가 중요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원리로 ‘플롯’을 강조했다. 그리고 비극의 소재는 ‘운명과의 대결’이다.

셰익스피어와 괴테는 비극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19세기부터 비극시는 사라진다. 대체하게 된다. 비극이 사라지는 과정은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리얼리즘 소설이 비극을 대체하고, 20세기 미국의 멜로드라마는 소설을 대체하면서다. 윤 교수는 “고대와 달리 현대에서는 영웅신화라는 소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플롯이 필요 없는 멜로드라마가 문학에 보편화됐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의 보편화가 ‘영웅’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윤소영 교수는 영웅신화는 그리스문학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국에도 서부개척과 제 2차 세계전쟁 승리가 있지만 헐리웃의 서부영화는 선정적이고 도덕적인 멜로드라마다. 윤 교수는 이 이유로 미국식 간접민주주의로서 선거정치의 결함을 지목한다. 문학이 미국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인민주의적 통치성에 수렴됐다는 것.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 모레티에 따르면, 헐리웃 영화의 시장점유율의 반 이상은 액션영화다. 나머지는 가족영화와 희극영화다. 액션영화는 언어장벽이 없는 만큼 문화적 할인(cultural discount)이 덜하기 때문에 세계화에 성공했다. 이 같은 영화는 인과관계로서 플롯이 최소화되고, 선정적인 명장면이 남발된다는 것이 윤소영 교수의 주장이다.

윤 교수는 멜로드라마의 특징으로 ‘도덕적 주제의 과잉’을 든다. “멜로드라마는 마니교적 이분법에 따라 선인과 악인의 대결이나 미덕과 악덕의 대립이라는 주제를 선호”한다. 그리고 “그 결말은 대체로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원리에 따른 해피엔딩”이다. 선정적 장면의 남발과 도덕적 주제의 과잉은 민족영화를 세계영화로 만든다.

영화뿐이 아니다. 윤소영 교수는 이 지점에서 ‘텔레비전’에 주목한다. 영화의 이미지와 라디오의 음향은 텔레비전에서 융합된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윌리엄즈는 텔레비전을 정치와 문화의 블랙홀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한다. 윤소영 교수는 텔레비전 없이 정치나 문화가 멜로드라마화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비로소 ‘스펙터클 사회’(드보르)와 ‘시뮬레이션 시대’(보드리야르)가 도래하면서 ‘일차원적 인간’(마르쿠제)이 양산된다.”

그는 문화뿐 아니라 정치도 “현실의 모순을 재현하지 않거나 아니면 재현하더라도 허구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윤 교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주목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의 주장을 소개한다.

알튀세르가 주목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는 ‘과학적 연극’이라고 불린다. 윤 교수는 이 서사극들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면서 이를 ‘비판적 연극’으로 명명한다.

브레히트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강조한 바 있다. 풀이하자면 “관객이 주인공과 동일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연극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이입은 없다. 오히려 그 대안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브레히트가 감정치료(카타르시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윤소영 교수의 주장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또한 ‘운명과의 대결’은 아니다. 브레히트는 평소 당당하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굴복하는 이야기를 극으로 꾸몄다. 이를 두고 윤소영 교수는 “소격/탈동일화 효과로 인해 배우의 연기/행위가 끝난 다음에 관객이 자신의 연기/행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윤 교수는 이어 “(세계전쟁 후에) 브레히트가 <갈릴레이의 생애>를 두 번씩이나 개정한 이유는 핵무기를 개발한 과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윤소영 교수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알튀세르는 비극을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라고 했다. 이 관객은 “관람이 끝나면서 관람을 완성하기 위해 (…) 생활 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연기를) 시작할 따름”이다.

문학 비판/ 윤소영 지음/ 공감 펴냄/ 2012년 10월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