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PD수첩을 집필했던 7명의 작가들의 눈으로 본 이번 'PD수첩 작가 전원 해고 사태'에 대한 릴레이 기고입니다. 8.16(목)부터 2주간 이틀에 한 회씩 총 7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다음 날, 나는 동료 PD와 술을 마시며 그를 추억했다. 그땐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또한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그렇듯, 좋은 추억들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들이 더 많았다. 나는 소위 ‘노빠’ 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참여정부 당시 ‘PD수첩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당시엔 정말 화가 났다. 민주주의 하에서 권력이 언론에 개입하고 크든 작든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권력의 입김은 그닥 세지 않았던 것 같다. 취재는 계속되었고 진실은 밝혀졌으며 방송은 나갔다. 그리고 제작진도 무사했다. 그렇게 황우석 사태는 끝이 났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아찔했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취재는 접어야 했을 것이고, 방송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방송을 강행했다면 나 또한 저들 못지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분명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황우석 사태’ 후에도 당시 정부에게 정말이지 ‘몹쓸 방송’을 또 감행했었기 때문이다.
2006년
방송 후, 제작진은 청와대로부터 놀라운 제의를 받았다. 한미 FTA를 놓고 제작진과 대통령이 방송으로 ‘끝장 토론’을 해보자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낸 아이디어라고 했다. 그만큼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절체절명의 과업으로 생각했고, 국민들의 반대보다 지지 속에 추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뜻밖의 제안에 더 놀란 쪽은 제작진이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정부의 핵심 정책에 대해, 그 정책을 비판한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함께, 대통령이 직접 ‘토론’을 하자니…그것을 방송을 통해 그대로 국민들에게 보여주자니…지금 시대라면 상상이 되는가.
그 토론은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초긴장 속에 토론 준비를 하던 즈음 급작스레 국제적 이슈가 터졌고, 이러저러한 사정이 겹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방송 역사상 길이 남았을 그 토론이 불발된 것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책은 미웠지만, 언론을 대하는 방식만큼은 차마 미워할 수 없었던 대통령. 나에게 있어 노 대통령에 대한 ‘추억’은 그렇게 남아 있다.
군사정권에서 시작돼 다섯 정권을 거쳐 오는 동안,
중요한 건 그런 ‘미운’ 프로그램을 대하는 정권의 태도다. 지금까지 모든 정권은 대체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전화로 불같이 화를 내고, 방송 내용에 반박하는 보도 자료를 내고, 기자회견을 열어 열심히 성토하고,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심지어 거액을 들여 신문에 반박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진을 용서할 수 없다며 협박하고, 권력기관을 동원해 물리적인 탄압을 가해온 적은 없었다.
그사이, 정권과 권력기관으로부터 쏟아지는 그 모든 불만과 압력에 대해 ‘바람막이’가 되어준 건 데스크를 포함한 ‘회사의 윗분’들이었다. 각 정권에 따라 그들이 ‘저 위’로부터 어떤 닦달과 고초를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 작가에게까지 그 ‘바람’이 전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작가를 할 때 팀장이나 국장에게 어떤 아이템에 대해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내가 들은 건 그저 꼬투리 잡히지 않게 잘 만들어달라는 ‘당부’뿐. 그 당부대로, 작가로서 묵묵히 내 할 일만 하면 그뿐이었다. 그것이 모든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서도
이 정권 들어
관련기사
그리고...급기야 작가들까지 전원 강제 퇴출이란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도 든다. 단지 ‘미운’ 차원이 아니라 ‘두려운’ 거구나…무엇이 그리 두려운 것인지.
MBC에서 작가 생활을 한지 올해로 만 20년째. 그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독하게 일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