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6월 어느 일요일. 자택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던 외국어대 이장희교수는 한 기자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해당기자는 이 교수가 2년전 발간한 ‘나는야 통일 1세대’란 어린이 대상 통일교육 서적을 ‘이적성 서적’으로 규정하고 이 교수의 사상에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이후 이교수는 근 6개월간 극심한 사상공세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불순한 사상을 이식시키려한 ‘좌경 교수’. 이 교수의 의사와 상관 없이 그에게 덧 씌어진 포승줄은 질기기만 했다.

이교수를 좌경으로 몰아세운 매체는 월간조선. 월간조선 이동욱 기자의 기명으로 97년 7월호부터 보도되기 시작한 관련 보도의 결론은 비교적 간명하다. 통일원이 4개월간 방송에 내 보낸 ‘통일 캠페인’이 북한의 연방제를 연상케 한다는 것. 따라서 이 캠페인에 참여한 광고제작자는 물론 자료로 이용된 간행물 저자, 통일원 실무자 모두 ‘문제 인물’이란 시각이었다.

이교수는 이 문제로 15대 대선 직전 공안당국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기도 했으나 법원이 영장을 기각, 감옥행 직전에서 빠져나왔다. 이교수와 월간조선간의 갈등은 급기야 법정 소송으로 비화, 현재 양측은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중이다.

이 교수는 “보수우익언론의 빗나간 영향력을 절실히 깨달았다. 거대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는 극우집단의 음모를 절실히 체험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이 교수는 조선일보의 사상공세에 용기있게 대처한 지식인에 속한다. 문민 정부 시절만해도 조선일보가 뒤를 받치고 월간조선이 최선봉에 서서 소위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들이댄 칼날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진보진영 인사는 부지기수이다. 대형 사업장의 노조, 재야인사, 학생운동권 등등…. 조선일보의 사상 공세는 다양하고 또 그만큼 거셌다.

월간조선은 특히 93년 7월 <‘추적’ 한완상 통일원 장관의 문제논문, 문제 발언>, 94년 6월의 <보수층의 표적 김정남 수석의 이념과 역사관> 등을 통해 문민 정부 고위층 인사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93년에 이어 95년 6월에도 월간조선에 의해 국가기밀을 야당의원에게 넘긴 혐의로 또 다시 파상 공세에 시달렸던 한완상 전 부총리의 증언.

“나에 대한 사상적 공세는 문민정부가 남북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자 이를 방해 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은 것이다.”

한 전 부총리는 이런 말도 덧 붙였다. “당시 각료 입장에서 언론보도에 일일히 대응하는 것이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는 일로 생각해 바람직하게 않게 봤다. 지금 상태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선일보는 한완상 전 부총리 재직 시절 사설 등을 통해 “대통령 측근 인사들의 국정 보좌 능력”에 대해 다반사로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일보의 문제제기는 다른 언론사로 전파되고 극우단체들의 집단 성명→보수우익정치권의 정치공세→ 공안당국 내사로 이어졌다. 결국 표적이 된 인사는 정치적 중상을 입을수 밖에 없었다.

최근에 일고 있는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역시 궤를 같이한다. 이 탓인지 최 교수 사상 문제가 월간조선에 실린 직후 소위 ‘조선일보에 당한 진보 인사’들의 자문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정권과 설혹 다른 방향일지라도 국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를 조선일보의 전통으로 꼽았다. 진보인사의 사상 검증 역시 ‘정치적 음모’ 차원이 아닌 ‘국익’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과연 그럴까. 최장집 교수 사태에 대한 월간조선의 문제제기 이후 나타난 한 기자의 반응은 이같은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기자는 “월간조선 보도를 문제삼는다해도 우리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말했다. 부연설명은 이렇다. “잡지는 모름지기 논쟁을 불러일으켜야하고 그럴수록 책은 더 잘팔린다.” 다소 농이 섞인 얘기였지만 ‘안보 상업주의’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의 진보인사에 대한 사상 검증이 그동안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해당 인사들과 권력의 저자세. 이 틈을 비집고 조선일보의 사상공세는 확대 재생산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검증의 향후 전도는 불투명한 것 같다.

청와대 정무수석실 한 관계자의 설명. “검증은 얼마든지 할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다만 유일잣대만 들이밀고 우리사회 구성원의 사상과 생각을 ‘검열’할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태도는 ‘사상 검열’일뿐 진정한 의미의 ‘검증’이 아니다.” 냉전 유령이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음을 실증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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