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폭력을 퍼붓듯이 쏟아낸다. 남자 주인공 조셉은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고, 홧김에 자기 개를 발로 차 죽이며, 상점 유리창을 깨뜨리고, 술집에서 싸움을 벌인다. 가만히 스크린을 보고만 있는데도 거칠고 불편한 감정이 서서히 차오른다.

만약 거리에서, 지하철이나 술집에서 이처럼 느닷없이 거친 말을 퍼부어대거나 폭력을 쏟아내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어떻게 반응할까? 우선 피하기 바쁠 것이다. 그 사람이 어째서 그런 언행을 하는지, 까닭이나 이면을 살펴볼 겨를은 없을 것이다. 익명의 얼굴들로 가득 찬 도시에서 마주하는 폭력과 거친 행동은 들판이나 숲에서 사나운 짐승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쿵쿵쿵쿵, 저기 저만치 공룡이 다가오고 있다면 얼른 뒤돌아 도망쳐야 한다. 공룡의 얼굴 표정이 어떤지, 공룡의 심정이 어떤지 따위를 살필 여유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내가 밟혀 죽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 공룡이 내 안에 들어앉아 있다면? 그때는 어째야 하나? 커다란 육식 공룡이 내 몸뚱이 안에서 제멋대로 쿵쿵쿵 돌아다니는지 도무지 내가 나 자신을 어쩌지 못할 때, 욕이라도 마구 퍼붓거나 유리창이라도 한 장 깨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차라리 실컷 두들겨 맞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할까? 그때도 아마 우리는 피해버리기 십상일 것이다. 스스로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외면할 것이다.


조셉은 운이 좋았다. 그도 역시 제 안의 공룡을 만나자 두려움에 벌벌 떨며 숨었다. 무턱대고 남의 가게로 뛰어들어 걸려 있는 옷 무더기 뒤에 타조처럼 머리를 처박고서 숨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한나가 있었다. 낯선 사람이 겁먹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갑자기 내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었는데도, 한나는 경찰을 부르기 위해 전화기를 집어 들지 않았다. 공룡을 피해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 대신 한나는 그냥 조셉에게 손을 내밀었다. 쫓아내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손, 무언가를 묻고 판단하기보다 그저 마주잡을 뿐인 손.

그냥 내미는 손. 세상에 그보다 더 고통으로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이해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데 익숙한 우리, 아는 사람에게만 말을 건네고 위로를 받고자 하는 우리, 마음 속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이유 없이 내밀어진 손을 보면 의심을 한다.

“왜? 왜 저 사람이 나에게 손을 내밀지? 왜 나에게 친절하지? 왜 나를 도우려 하는 거지?”

오히려 내치고만 싶어진다. 짐짓 더 거친 말을 퍼부으며 손 내민 상대를 괴롭힌다. 그 손의 진위를 시험하고 싶어 한다. 진짜 내게 내밀어진 손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조셉은 그랬다.

그러자 서서히 한나의 고통이 드러난다. 조셉이 제 안의 분노를 어쩌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면, 한나는 까닭 없이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었다. 간절한 기도로도 몰래 마시는 술로도 해소되지 않는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둘의 만남은 신기하다면 신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엇갈려 있긴 해도 그들 사이에는 폭력이라는 고리가 간당간당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한나 또한 고통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조셉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통 받는지, 어째서 그렇게도 거칠어졌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죽은 아내 때문일 수도 있고, 죽어가는 친구 때문일 수도 있고, 아내와 친구를 고통으로 몰고 간 자기 자신 때문일 수도 있다. 앞집 개가 짖어대서일 수도 있고, 마권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려서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무엇 때문이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한다. 누구라도 취할 때가 있다. 살다 보면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공룡을 만날 때가 있다. 자신이 공룡이 될 때도 있다.

한나는 신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어서 그냥 손을 내밀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냥 손을 내밀 수 있었다. 손을 내밀어 마주 닿으면 그쪽만이 아니라 이쪽까지도 따스하기에.

모든 악한 뒤에는 고통이 있고, 모든 고통 뒤에는 인간이 있다.

우리는 종종 그걸 잊고 말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냥 내민 손은 그걸 안다. 손은 꺼풀을 하나하나 벗겨내, 악한 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고통 뒤의 인간을 어루만진다.

조셉 역의 피터 뮬란의 얼굴은 그야말로 한 권의 책이자 한 편의 영화다. 겹겹이 숨은 인간의 내밀한 뒷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불완전한 인간의 숨은 얼굴을 따라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준다. 한나는 그 얼굴을 읽었다.

조셉과 한나는 서로 만난 뒤에도 쉽사리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섣불리 부둥켜안거나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금세 구원받지는 못했다. 괜히 손을 내밀었다며 후회하기도 하고, 당신의 고통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며 냉정하게 내치기도 했다.

도리어 또 다른 폭력이 그들을 구원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기에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어린 친구 샘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개도 죽였다. 올바르게 살지만은 못했다. 감옥엘 갔다. 어떻게든 살았다. 갑자기 선한 인간이 된 것도 아니고, 모든 고통이 일거에 사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어젯밤에 취해 일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오늘 아침엔 또 다시 살아간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고통은 실재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품어보았다. 조셉과 한나는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우리는 모두 살면서 작고 큰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과연 고통의 실체는 무엇일까? 실체가 있기는 한 걸까?

마음의 고통은 몸의 통증과는 다르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가도,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방금까지 피처럼 선연했던 고통이란 존재가 사라지고 없다. 뜬구름처럼 순식간에 모양을 바꾼다. 그 고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친구의 장례식에서 상실의 눈물, 고통의 눈물을 흘린 뒤에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른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인간들끼리 마주보며 웃는다.

조셉과 한나의 고통이 물러난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를 보고서야 나는 생각했다. 고통은 실재한다기보다 어쩌면 그저 부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소통의 부재, 공감의 부재, 공명의 부재가 다름 아닌 고통의 얼굴이다.  

가슴 속을 거니는 공룡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마주볼 수 있을 때, 고통으로 일그러지다 못해 폭력으로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냥 손을 내밀 때,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디어 한나’로 시작되는 편지를 쓸 수 있을 때, 그리고 긴 시간을 건넌 타인의 눈을 마주보며 말없이 웃음 지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독한 고통도 치유할 수 있다. 어제 엉망이 되어버린 삶을 오늘 다시 이어갈 수 있다. 소통이 시작되는 곳에서 고통은 사라진다. 한나의 웃는 얼굴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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