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논객 전원책은 TV토론에서 군대에 대해 “폭력을 독점하고 관리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비틀어보면 폭력은 억압적 국가장치(군대·경찰)에서 재생산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뒤집어보면 폭력은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는 말이다.

무엇을 위해? 물론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위해서다. 그러나 “국가는 부르주아지들의 집행위원회”라는 마르크스의 설명이 오늘날 현실성이 없듯 폭력도 그리 단순하게 분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폭력의 상이한 형태는 사회적으로 발명된다.”

폭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답은 양자택일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고 물었고, 생태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환경 파괴냐 자본주의 파괴냐’고 물었다. 수정주의 논쟁은 ‘혁명이냐 개혁이냐’는 질문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를 등장시켰고, 발터 벤야민은 치안을 법보존적 폭력으로 노동자총파업을 법정초적 폭력으로 생각했다.

여기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임노동 관계라는 착취구조를 폭력이라고 규정한다는 거다(착취는 과잉착취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수탈자들을 수탈하는 행위로서 폭력혁명을 강력한 이행강령 중 하나로 인식해왔다는 거다. 마르크스 사후, 소련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왔다. 조직화된 노동자운동의 정치투쟁과 미조직화된 노동자들의 궁핍화를 잇는 이론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이론적 대세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말렸고, 반대편에 있는 의지주의는 무모한 전술로 제 살을 깎아먹었다. 경제위기의 시대, 시민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건 ‘전망이 없다’는 회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무기력을 깨는 시도가 부단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푸코와 데리다에 의한 외부자극도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안으로부터 혁신하려는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노력이 결정적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답할까. 그는 간디의 비폭력, 사파티스타의 대항폭력이 아니라 ‘반폭력’을 들고 나왔다. 그의 문제설정이 처한 곳은 바로 ‘게발트’다. 독일어로 ‘폭력’을 뜻하는 게발트는 넓게는 폭력의 조건과 제도를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정치(계급투쟁)의 원인인 ‘적대’의 토대로서 ‘경제적 착취’라는 게발트를 발견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지적한다. 바로 착취의 문명화에 대응해 혁명의 문명화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국가와 자본은 빈부격차와 궁핍화를 심화시키고 있지만 세계적 하청체계를 구축하는 등 이에 대한 불만을 (그들이 보기에) 세련되게 관리하고 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라는 진부한 구호만 쥐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국가는 게발트를 독점하고 이를 점점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착취의 문명화와 함께 치안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레닌이 제기한 ‘제국주의 전쟁이냐, 혁명적 내전이냐’는 전술에 주목한다. 그는 “레닌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와 인도에서 간디가 이론화하고 실행한 ‘비폭력’·‘시민불복종’의 정치 사이의 대결”을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이뤄지지 못한 위대한 만남이라고 한다. 그는 이 만남에서 어떤 걸 얻으려는 걸까.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단면을 바라본다. 첫째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음의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국가게발트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분’되는 ‘살아 있는 죽은 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억압불가능한 최소로서 사회적 관계의 저항 가능성을 긍정하며 정치의 인간학을 제기한다.

둘째는 집단적인 정치적 능력의 한계로서 ‘근본악’을 구별할 수 없는 극단적 폭력의 인간학이다. 발리바르는 근본악에 대해 “주체와 객체, 도살자와 피해자, 요컨대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별을 무너뜨리는 경향”이라면서 “(근본악에 의해) 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과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고 지적한다. 반혁명적 혁명인 ‘나치즘’은 이를 보여준 가장 큰 ‘재난’이다.

마지막으로 발리바르는 게발트에서 시민권과 시민다움(시빌리테)의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다. 국민사회국가라는 헌정질서가 민족, 인종 등 폭력적 기준에 정초해 시민권을 발명했다면 시민다움의 정치는 이러한 폭력에 대해 비폭력도 대항폭력도 아닌 폭력에 대한 반대, 권리들을 위한 권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에 빠진 오늘 노동자운동이 국가와 자본의 게발트에 저항해 승리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 3의 길, 파시즘을 불러 올 거라는 예상이 떠돌고 있다. ‘노동자의 절멸이냐, 자본과 공멸이냐’는 양자택일의 질문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비극만을 예비한 질문에 발리바르가 답한다.

“권력의 악마적 요소 속에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고유한 과제라는 베버의 정식을 ‘아래로부터’ 응용하면 바로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권력에서 가장 악마적인 것은 권력의 무기력함이라고, 그도 아니라면 권력에 본래적인 전능함의 미망이라고 덧붙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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