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PD들의 고민이다. 언제까지 지상파에서 몸을 팔 것인가? 일부 저작권을 보장해주는 조중동의 종편 채널과 손을 잡을 것인가? 양쪽 모두 정답이 아니다. 독립영화를 만들어 극장에서 틀까? 불확실성이다.
‘자신의 표현과 주장’을 한다는 측면과 ‘생계형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측면은 결코 공존이 불가능하다. 한국이라는 독과점의 사회에서는 논리의 우회와 변명보다는 정면 승부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명쾌하지 않을까?”(00 독립영화 감독의 SNS에서)

독립PD란 방송가의 불안정 노동자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 연출하는 PD의 통칭이다. 독립PD 가운데엔 제작사 소속의 정규직도 있고 비정규직도 있다. 방송사 내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PD와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프리랜서 PD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프리랜스 PD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외주 PD는 통상적으로 독립PD 개념에서 제외된다. 그들은 대개가 방송사 정규직 출신들로 자신들의 정체성과 계급성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독립’이란 단어로 인한 혼란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이후, 관객들은 독립영화에 대중적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독립영화인’과 ‘독립PD’는 다르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인 것은 일부 맞으나, 이충렬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과 계급성을 독립PD에서 찾는다. 

물론 이 두 진영을 넘나들며 양쪽 모두를 활동하는 이도 꽤 있다. 독립PD는 방송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제작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독립영화인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신의 표현과 주장’으로서의 프로파간다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활동가다. 그렇다면 독립PD의 ‘독립’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접두사가 된다. 아웃소싱이란 측면의 ‘외주’란 단어가 주는 굴욕감을 대체한다는 측면에서 나온 단어가 ‘독립’이다.

글머리에서 소개한 모 감독이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일군의 독립PD들이 ‘자신의 표현과 주장’을 한다는 측면과 ‘생계형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걸 공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고, 나는 그게 가능하단 생각에 접점을 모색하고 있다.

정면 승부하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걸, 지난 3년간 나름 시도를 했다. 돌아오는 것은 ‘돈키호테’였다. 이미 생계형에 익숙한 상황에서 그걸 박차고 정면 승부한다는 건, 생활인으로서 자살에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지상파 정규직은 외주PD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자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런 식의 글을 쓰는 것도 이미 목숨을 건 정면 승부가 된다. 물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라는 비난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서도.

이건 형용모순일 수 있겠지만, 독립PD로서의 계급성은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의식화를 하되, 방송이란 정치성의 영역에선 지극히 조직 이기주의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게 지금 내 나름의 전략이다. 그것이 종편 등장에 따른 나의 변절 지점이다. 그러면서 언론노조가 외주PD들에 대한 착취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 전체 방송의 공공성보다는 일부 지상파의 이익을 위하는 이익집단으로서 보인 폐해는 최소화하겠다는 모순적인 전략을 펴려 한다. 형용 모순에 상황모순이 동시에 겹친 전략이자 지극히 기회주의적인 전략을 펴려 한다.

   
이성규·독립PD
 
일개 독립PD들이 ‘지상파방송’이란 거대 권력을 넘어서는 것은 이리도 어렵다. 지금 나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 연출하는 독립PD로서 현재 지상파의 추석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고, 종편 채널과 손잡을 요량으로 다큐멘터리를 새로 기획 중이며, 동시에 극장 개봉을 위한 창작자로서 제작에 임하는 ‘유목 창작 여행’이란 다큐멘터리를 이미 촬영하고 있다.

거기에 자본과 권력으로 부터 독립한 영상활동가로서 쌍용자동차 옥쇄 파업 이후를 다루고 있는 <당신과 나의 전쟁 2>를 제작하고 있다. 이미 ‘나’란 독립PD의 존재 속엔 엇갈리는 딜레마가 서로 칼을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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