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정부종합청사 8층 외무무 기자실에서는 서대원 외무부대변인의 실국장회의 브리핑이 있었다. 브리핑 도중 서대변인은 “뉴욕에서 진행된 경수로공급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돼 마무리단계에 와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 가벼운 긴장을 느꼈다.

지난 91년부터 통일원과 외무부를 출입하면서 남북회담, 핵회담 등을 여러차례 지켜본 기자로서는 “마무리단계”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정부 당국자가 공식 브리핑에서 마무리단계에 있다고 말할 경우 사실상 협상이 타결돼 발표만 남겨두고 있던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뉴욕특파원들이 수차례에 걸쳐 ‘경수로협상 타결 임박’이라는 기사를 썼음에도 당국자들의 대답이 한결같이 “아직 많이 남았다”였던 것을 비교하면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원을 밝힐 수는 없지만 협정문안이 모두 타결됐고 15일경 발표한다는 사실이 이날 오후 포착됐다. 그러나 문제는 내용이었다. 합의 내용 없이 ‘경수로 완전타결’이라는 기사를 쓸 경우 노태우.전두환 두대통령이 구속되는 간단치 않은 상황에 묻혀 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일단 12일자 기사는 ‘경수로 주내 타결’로 송고했다.

다음날 오전 중요내용을 대부분 취재할 수 있었다. 상당한 흥분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갈등이 생겼다. 발표를 15일경에 하기로 한 것은 경수로협상 구조상 한국, 미국, 일본과 북한의 합의사항임이 분명하다. 우리쪽에서 먼저 기사가 나갈 경우 이들 나라에 대한 외교적 신뢰가 손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경수로타결은 ‘팩트(fact)’였다. ‘누가 써도 쓸텐데…’ 먼저 쓰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보안을 위해 이날(12일) 오후 회사에 들어가 기사를 작성했다. 13일자 기사송고를 끝낸 뒤인 오후 5시반경 외무부 대변인실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13일) 오전 10시반 협상 내용을 엠바고 브리핑(일정 기간은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브리핑)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난 뒤였다.

다음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엠바고 브리핑은 예정대로 열렸으나 엠바고는 지켜지지 않았다. 이미 동아일보에 다 나온 내용이 엠바고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정부가 협상 내용을 미리 흘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각이 제기됐고 기사가 나간 경위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국자들은 만의 하나 북한에서 반발해 판을 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

결국 일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기분은 개운치 않았다. 나 개인은 특종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국익에는 누를 끼친 셈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언론관행으로 볼 때 기사를 안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경우 국익이 걸린 외교기사등에는 정부와 언론이 철저하게 협조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제 우리 정부와 언론도 외교기사와 국익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해 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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