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하원 의원 646명의 활동비 청구 내역을 공개해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2008년 기준으로 2만4천파운드, 의원 1명이 받아간 활동비가 우리 돈으로 2억6천만원 정도로 집계됐는데 여기에는 수영장 청소비용과 가정부 임금, 애완견 사료 구입비용 등 부적절한 청구 내역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변기 뚜껑을 1년에 두 차례나 교체하고 이를 청구한 의원도 있었다.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하원의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했다. 이 어마어마한 특종을 놓친 경쟁 일간지 가디언은 발상을 전환했다. 가디언은 하원이 공개한 의원들의 청구서 45만8천여건을 모두 스캔해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고 독자들에게 기사거리를 제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인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만7천여명이 참여해 22만1천여건의 청구서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
가디언은 독자들이 '재미있다', '재미없다', '재미있지만 알려진 내용이다', '추가 취재 필요' 등 4가지 카테고리 가운데 하나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경쟁 요소를 도입해 어떤 정당과 어떤 의원이 가장 문제가 많은지 독자들 가운데 누가 더 많은 영수증을 분석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하버드대 부설 니만저널리즘연구소는 "가디언의 시의적절하고 발 빠른 대응이 변덕스러운 독자들을 붙잡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은 대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합성어로 그동안 해당 업계 전문가들이나 내부자들에게만 접근 가능했던 지식을 공유하고 외부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참여를 유도해 혁신을 모색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이란 뉴스의 생산 과정에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의 아이디어와 콘텐츠, 참여를 활용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우리나라 오마이뉴스가 표방한 시민저널리즘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디언은 올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보도에서도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을 활용해 재미를 봤다. '팬즈 네트워크(Fans' Network)'라는 페이지를 만들고 세계 전역에 걸쳐 125명의 독립 저널리스트들을 선발했다. 이들에게 경기 분석과 전망 등의 기사를 제공 받았고 경기가 끝나면 독자들이 직접 선수들 평점을 달도록 해 역동적인 지면을 구성했다. 사진 공유 사이트 플리커에 개설한 월드컵 페이지에는 1500장이 넘는 사진이 올라왔다.
미국의 블로그 신문 허핑턴포스트도 가디언과 비슷한 실험을 한 바 있다. 지난해 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기부양책과 관련, 1400페이지에 이르는 예산안을 통째로 사이트에 올려놓고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찾아달라고 독자들에게 요청했더니 367명의 독자들이 응답을 보내왔다. 이 가운데 상당한 의견이 기사에 반영된 것은 물론이다. 허핑턴포스트의 창업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독자들의 지혜를 빌렸더니 훨씬 풍성한 기사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CNN '아이리포트' 멕시코만 기름유출사건 시민제작 동영상 5098건
NYT '모멘트 인 타임' 전 세계 1만3천장 이상 '전문가 수준' 사진 업로드.
'스팟어스' 아이템 동의하는 독자들 기부금으로 취재비용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즈의 '모멘트 인 타임(Moment in Time)' 프로젝트는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이 성공하기 위한 요소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사례다. 독자들이 보내 온 사진을 지구 모양의 3차원 화면에 입체적으로 배치해 보자는 장난스러운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켜 서버가 폭주할 정도였다. 세계 전역에서 1만3천장 이상의 사진이 업로드 됐는데 전문가들 뺨치는 수준 높은 사진도 많았다.
▲ NYT '모멘트 인 타임'. | ||
▲ CNN '아이리포트'. | ||
미국의 소셜 뉴스 사이트 스팟어스(Spot.us)의 실험도 흥미롭다. 기자가 취재 아이디어를 내면 이에 동의하는 독자들이 기부금을 내서 취재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최소 금액은 20달러부터인데 세금 공제 혜택이 있고 만약 이렇게 작성된 기사가 주류 언론에 판매될 경우 이 금액을 전액 돌려받을 수도 있다. 독자들이 십시일반 비용을 대기 때문에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스팟어스' | ||
올해 퓰리처상을 받은 프로퍼블리카(ProPublica)는 탐사보도 전문 비영리 뉴스 사이트다. 월스트리트저널 편집국장 출신의 폴 슈타이거를 중심으로 32명의 전문기자들이 운영하는 이 사이트는 100%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작성된 기사는 뉴욕타임즈 등 제휴 언론사에 무료로 공급된다.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광고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주류 언론이 탐사보도를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그 틈새를 공략한 대안 언론으로 주목된다.
우샤히디(Ushahidi)라는 사이트에서는 크라우드 맵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샤히디는 스와힐리어로 '증언'이라는 뜻인데 당초 케냐의 폭동 상황을 지도 위에 표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사이트였으나 크라우드소싱 서비스를 위한 오픈소스 사이트로 발전했다. 이 사이트는 아이티 지진과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태 때 불특정 다수 제보자들의 참여로 재난 상황을 신속하게 집계해 눈길을 끌었다. 우샤히디의 통계는 그 어느 주류 언론보다 더 빠르고 정확했다.
크라우드소싱을 활용한 팩트 확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언론사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인터넷 신문 뉴스트러스트(Newstrust)는 인터넷에 떠도는 확인이 필요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공개 검증을 요청한다. 독자들은 진실 혹은 거짓에 투표를 하거나 의견을 남길 수 있다. 집단 지성을 팩트 확인에 활용하는 시스템이지만 아직까지는 실험적인 수준이라는 평가와 함께 좀 더 많은 전문가 그룹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관련기사
이밖에도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을 활용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는 소셜 미디어 전문 블로그인 매쉬어블(Mashable)과 포괄적 기사 제휴를 맺은 바 있고 워싱턴포스트는 정치 전문 블로거들에게 기사를 공급받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지역 소식을 다루는 페이지를 구축해 뉴욕대 교수와 학생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다. 장기적으로 지역 시민들이 참여하는 하이퍼 로컬 뉴스 사이트로 키워나간다는 계획이다.
이성규 매일경제 모바일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언론진흥재단 보고서에서 "주류 언론의 종사자들이 '시민 공포증'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때 저널리즘은 진보한다"면서 "그때 대화와 단절이 빚어낸 신뢰의 추락에서 헤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연구원은 "주류 언론의 형식성에 시민의 자유로움과 의지를 가두지 말고 독자들에게 기사가 아닌 정보를 요청하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