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끼>는 원작인 윤태호 작가의 웹툰 ‘이끼’와 같이 보기를 권한다. 굳이 먼저 볼 필요는 없지만, 영화를 본 후 다시 보게 된다면 원작에서 다소 생략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설정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포털 사이트 ‘다음’에 연재되었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이끼>는 20년간 의절했던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그가 살던 시골마을로 찾아간 아들 해국(박해일)이 그곳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다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로, 그 작은 마을에서 해국이 맞닥뜨리게 되는 진실은 한국 사회에 마치 ‘이끼처럼’ 붙어있는 일상적이고도 끈질긴, 결코 근절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끼>에 등장하는 한국 현대사의 더러운 이면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목격하고 있다. 그 모순의 해소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냐”는 이장 천용덕(정재영)의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대중들이 암묵적으로 그 더러움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훨씬 섬짓하게 다가온다. 성폭행 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로 변질되고 피해자가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것을 가깝게는 밀양사건에서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은 성추행범을 다시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주는 일을 낳기까지 했다.

   
  ▲ 영화 '이끼' 포스터  
 
한국 현대사의 추한 이면 … 대중의 암묵적 용인으로 유지

영화와 웹툰 <이끼>에서 핵심인물은 이장 천용덕이다. 마을의 시작과 끝인 천용덕은 류목형(허준호)의 도덕적 카리스마에 기대 마을을 만들었으나 그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탐욕대로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 인물이다. 마을 주변 땅을 (불법적으로) 모두 매입한 후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고, 경찰을 매수하여 뒤를 덮고, 정치권, 검찰 등 권력과 유착해서 개발 이익을 나누는 등의 행동을 일삼는다. 류목형이 종교 같다면, 천용덕은 그의 권위에 기댄 현실의 사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와 류목형의 차이점은 그는 인간이라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류목형의 이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천용덕에 의해 좌절되고 이용 당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천용덕의 ‘완성’을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뜨고 지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천용덕 캐릭터는 한국 사회 권력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리는 각 마을마다 1명씩의 천용덕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 양식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부의 축적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멀게는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피와 뼈>의 아버지, 가깝게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까지 권위주의 시대가 보여주었던, 그리고 용인되어 왔던 ‘생존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 마을마다 1명씩의 천용덕이 가지고 있는 거미줄 같은 한국사회의 커넥션은 재산과 권력을 각각의 영역에서 분점하며 강고하게 그 기득권을 지켜간다.

천용덕이라는 존재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국가 그 자체’로 설정되어 있는 듯 보인다. 부의 축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부동산 개발이라는 제1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고 종교를 허울로만 남기고 그 권위를 세력 확장에 이용하며 ‘판옵티콘’처럼 공포와 감시를 통해 마을과 주변인들을 장악하는 것. 이것은 국가, 특히 한국 사회가 기능했던 방식과 동일하다. 적당한 오만과 자기애는 권력을 놓아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표현방식이며, 영악함과 기만은 현재도 즐겨 쓰이고 있는 대중 통치 기술이다.

각 마을마다 한 명의 천용덕이 있다

그의 처세와 성격은 결코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원작과 영화 모두에서도 그런 언급은 빠져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캐릭터 구축처럼) 천용덕의 어린 시절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은 일종의 상징인 ‘천용덕’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캐릭터의 작동도 ‘개인사적 인과성’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구축되어있는 상태’ 그 자체의 캐릭터이다. 자신의 영역 내에서 자신에게 허용되는 모든 것을 누리려하고, 그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는 것. 그가 목격한 질서 안에서 생존하는 방식 자체가 그런 것이다. “세상 사는 법을 알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찰 만한게 없다.(웹툰)”는 천용덕의 말은 이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단 한줄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천용덕은 그런 질서 안에서 ‘생존’하는 것에는 어떤 품성과 자질이 필요한지를 스스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 윤태호 원작의 만화 '이끼' 의 주인공 이장 천용덕.  
 
탐욕을 멈추는 순간, 그가 마을에서 감시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그가 기댔지만 지금은 유명무실한 류목형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며, 김덕천 등 마을 심복들로 인해 생겼을지 모르는 균열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을 것이다. 바로 ‘두려움’. 그건 ‘통제되지 않는’ 류해국이 마을에 등장하면서 천용덕의 파멸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흥미로운 점은 결코 멈출줄 모르는 영역확장이 가족을 지키기 위함도, 대대손손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는 점이다. 마치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탐욕과 확장을 본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만약 천용덕이 자신과 류목형이 가진 땅만으로 만족했다면? 그냥 그 마을을 유지하는 것으로 안분지족하며 살아갔다면 어떠했을까. 다른 천용덕이 나타나 그를 집어 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법과 기만으로 쌓아올린 부… 우리 안의 천용덕이 괴물 만들어

천용덕 캐릭터의 탐욕과 감시, 그리고 기만이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왜 한국 사회가 ‘사소한 균열’에, ‘통제되지 않는 것’에 그렇게도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천용덕이 세운 세상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 불법과 기만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천용덕 스스로가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건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탐욕스런 개발을 멈추는 순간 거품처럼 무너진다는 점, 그리고 공포와 탐욕, 기만으로 쌓아올려진 현재의 기득권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히스테리. ‘한국 사회 그 자체’로 상징되는 천용덕 캐릭터는 한국 사회 ‘아무 곳이나, 어디나’ 있다. 우리 안의 ‘천용덕’이라는 존재가 지금의 괴물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천용덕을 잡으려면 원작에서처럼 대한민국을 ‘대청소’해야될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청소를 ‘두려움’으로 여기는 순간이 천용덕이 힘을 얻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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