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수사발표를 인용 보도한 것이라도 언론사는 당사자의 명예훼손에 대해 손해배상해야 한다는 서울고법 민사합의 12부의 판결은 사실상 법원의 확정판결 전 형사피의자에 대한 실명보도 거의 모두가 이같은 판결에 저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계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패소한 언론사 모두 상고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고법 판결이 △피의사실의 공표를 금지하고 있는 형사소송법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고 △확정 판결 이전의 무죄로 간주한다는 무죄추정 원칙등을 주요 논거로 삼고 있는데다 △명예훼손에 대한 사법부의 보다 원칙적인 판결 추세등을 감안할 때 법률심인 대법원에서 고법 판결이 바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공신력 있는 경찰이나 검찰의 발표를 언론이 보도하는 것을 모두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것이냐는 점등은 대법원 심리과정에서도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 제공 정보의 신뢰성 여부에 대한 1, 2심 재판부의 판이한 판결도 쟁점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언론계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대별된다. 이번 판결이 범죄와 관련된 보도의 익명주의 등 보도원칙을 다시금 환기시켰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언론의 취재보도 여건및 언론보도의 관행상 현실을 무시한 판결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재판부가 우리 사회의 법질서 수준과 사회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채 언론보도에만 책임을 묻는 격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먼저 긍정론은 언론의 피의사실 보도와 관련된 기존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는 데 모아지고 있다.

범죄관련 보도는 피의사실이 범죄로 확인되기까지 해당 피의자를 익명으로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재판부 역시 “대중매체가 신속한 보도를 하는 과정에서 관련자(피의자)의 신원을 밝힌다면 그것은 예단적 판결과 같은 폐해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언론의 피의자 실명 보도의 문제점은 법조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 온 터였다. 주로는 피의자의 인격권 보장 문제로 실제 혐의 사실이 허위로 밝혀진다해도 언론 보도의 ‘공신력’으로 인해 주위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피의자에게 인격적 모멸감을 안겨줄 수 있는 만큼 언론의 신중한 보도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이번 판결은 공식발표를 통하지 않은 범죄에 관한 보도는 사실여부에 대한 정확한 확인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재판부는 “경찰의 공식발표를 재보도한 것일 뿐”이라는 피고측 주장에 대해 ‘이유 없음’의 근거로 “고소사건의 수사가 종종 고소인의 일방적 주장과 자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현실”임을 주지시켰다.

이와 관련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안상운 변호사(언론위원회 위원장)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지켜봐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이번 판결이 “언론의 익명보도 원칙과 공표보도 원칙을 다시금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반면 현장의 취재 기자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판결의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현 언론의 보도관행상 고쳐지기는 힘들 것”이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선 “기사를 쓰지 말란 것이냐”는 항변도 있다.

한 신문사의 법조기자는 “기사의 공신력을 위해 피의자의 실명 보도는 불가피할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신문사의 경찰기자는 “언론사간 취재경쟁이 치열한 데 단독보도의 경우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실명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밖에 기자들은 마감시간 등에 걸려 사실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사를 작성할 때가 많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한 신문사의 경찰기자는 “이는 경찰이나 검찰의 조서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즉 언론의 취재경쟁과 속보경쟁이 피의자 익명보도와 범죄사실의 사건 공표보도 원칙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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