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첫번째 사명은 ‘사회 감시’다. 언론은 사회 감시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언론이 사회 감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의지의 결여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취재 시스템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우리 언론의 사회 감시 기능중 가장 큰 몫은 정치에 할당돼 있다. 비판을 했다 하면 주로 정치 비판이다. 왜 그럴까? 정치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일까? 결코 그런 것 같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비판을 정치에 집중시켜서 정치가 달라질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정치가 개판인 이유는 정치때문이 아니다. 해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비판을 아무리 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취재시스템 달라져야

언론의 취재 시스템은 취재원의 가시적이고 공식적이고 접근 가능한 활동 중심으로 편성돼 있다. 물론 이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언론의 관행이지만, 그 관행에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 이제 심각하게 재고할 때가 되었다.

기존의 취재 시스템은 우리사회 힘의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비판은 정치권에만 집중된다. 정치권의 부정적인 모습이 취재 그물망에 잘 걸려들기 때문이다. 반면 대통령과 검찰 등 권력 실세들의 경우엔 홍보성 보도가 난무한다. 그들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뉴스의 의제 설정권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렇다. 정치권은 언론에 지나치게 노출돼 있다. 유리 어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는 일과중의 공식적인 취재활동으로도 모자라 수시로 정치인의 집을 찾는다.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취재 그물망에 걸려 들게 돼 있는 것이다. 반면 대통령과 검찰은 어떠한가? 기자는 그들이 부를 때에 한해서 그들을 취재 대상으로 삼으며 그들을 자유롭게 취재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정치 뉴스는 재미있다. 때로 정치인들간의 정략 대결과 암투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그 재미에 정신이 팔린 기자는 실제로 정치 소설을 쓰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 해도 비판할 건수는 무궁무진하다. 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느냐고 꾸짖을 수도 있고 국민이 무섭지 않느냐고 호통을 칠 수도 있다.

언론에게 정치인은 만만하다. 아무리 두들겨 패도 좀처럼 명예훼손으로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반면 대통령과 검찰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함부로 썼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통령과 검찰에 관한 기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회의 파행과 혼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김영삼 대통령이다. 국회의 파행과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도 김대통령이다. 그러나 정치권을 죽어라 하고 두들겨패는 언론의 정치보도에선 김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왜? 국회를 담당하는 기자가 따로 있고 대통령을 담당하는 기자가 따로 있으며 대통령을 담당하는 기자에겐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검찰의 위상과 관련된 야당들의 주장도 평소 언론이 사회 감시를 제대로 했다면 굳이 야당들이 들고 나올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언론은 그저 중간에 서서 야당은 이렇게 말하고 검찰은 이렇게 말하고 청와대는 이렇게 말하고 누구는 저렇게 말하더라는 식의 중계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성역’ 존재해

언론의 가치 판단은 주로 정치 비판을 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오늘부터 신문과 방송을 유심히 관찰해보시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런다. 대통령과 검찰에 대해 보도할 땐 언론은 일체의 가치 판단을 거부하고 ‘순한 양’이 된다.

언론은 기존의 취재 시스템을 재고하라. 진짜 권력이 있는 곳에 보다 많은 기자를 배치하고 감시를 더욱 강화하라. 물증이 없으면 끊임없이 당위라도 역설하라. 가시성, 공식성, 접근 가능성, 흥미성, 그리고 물증 위주로 보도를 하면 권력은 영원히 언론 비판의 성역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을 성역시하면서 아무 힘도 없는 정치인들에게 비판을 집중시키는 쇼는 이제 그만두자. 너무 질려 이젠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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