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대학의 외과 과장 '장준혁'이 죽었다. 간담췌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장준혁(김명민 분)이 역설적이게도 담관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천재적인 의술과 탁월한 처세술을 바탕으로 대학병원 외과 과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장준혁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하얀 거탑>(이기원 극본, 안판석 연출)은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한국 TV드라마의 안일한 등장인물 창조 관행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 <하얀 거탑>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천재적인 의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외과 의사라는 거대한 탑을 쌓아가면서 우리 시대 성공신화의 빛과 어둠을 잘 보여준 장준혁은 최근 TV드라마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형상화가 잘 된 인물이다. 매력적인 천재 의사지만, 야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굴욕도 참아내는 장준혁에게서 호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장준혁을 미워할 수도 없다. 그는 바로 나,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장준혁은 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최고의 실력은 물론 눈빛만으로도 외과 조직을 장악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장준혁은 분명 강인한 남성이다. 그러나 조직 사회의 숨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정영숙 분)나 정부(情婦) 강희재(김보경 분)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장준혁은 단지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한 남성일 뿐이다.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의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상고 이유서를 쓰고,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간담체 분야의 예외적인 증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시신을 의학 해부용으로 기증할 정도로 일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장준혁! 그러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피로감이 몰려올 때마다 어깨를 웅크리고 어머니의 품을 찾는 그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는가? 개인과 조직의 자장(磁場) 안에서 발생하는 강약(强弱)의 진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준혁은 이렇게 최근 TV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매력적인 등장인물로 자리매김했다.

   
  ▲ MBC <하얀거탑> ⓒMBC  
 
이주완(이정길 분) 과장과 우용길(김창완 분) 부원장은 또 어떤가? 이주완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고, 우용길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면서 조직사회의 구성원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노회한 인물이다. 이주완과 우용길은 조직 사회의 냉혹함과 복잡 미묘한 인간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외과 과장 선거와 의료사고, 법정 분쟁, 담관암 판정과 죽음 등 장준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적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이주완과 우용길의 성격 묘사는 매우 탁월했다.

그러나 <하얀 거탑>의 성과는 여기까지다. 장준혁과 이주완, 우용길을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성격 창조가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극적 긴장의 밀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극적 긴장감은 주체자와 반대자의 팽팽한 힘의 균형으로 대립각이 형성될 때 고조된다.

그런데 <하얀 거탑>은 장준혁과 노민국(차인표 분)의 대결, 장준혁과 최도영의 대립, 대학병원이라는 조직과 망인의 유가족이라는 개인의 대립 구도를 극적 개연성에 근거하지 않고 당위성의 차원에서 기능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극적 긴장의 밀도를 떨어뜨렸다.

특히 장준혁과 같은 지점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평행선을 가는 최도영(이선균 분)의 성격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고 극적 상황에 따른 역할만 강조된 것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바람직한 의사의 전형으로 제시된 최도영이 장준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 사고를 촉발시킨 담당의사 염동일(기태영 분)이나, 이주완 과장의 외동딸이자 시민운동가로 최도영과 함께 유가족의 법정 소송을 도와주는 이윤진(송선미 분), 인권변호사 김훈(손병호 분), 간호사 유미라(장소연 분) 역시 심리적 개연성이 아닌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의료 사고와 법정 소송 과정에서 장준혁의 반대편에 위치한 주요 인물들이 심리적 개연성 없이 상황에 따른 역할만 수행했기 때문에 극적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등장인물의 성격 구축과 역할 설정에서 장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하얀 거탑>은, 비록 일본 원작소설과 그것을 각색한 일본 TV드라마에 근거한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최근 한국 TV드라마의 안일한 등장인물 창조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봄꽃과 더불어 각양각색의 TV드라마가 3월 셋째 주 안방극장을 화사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하얀 거탑>의 의미 있는 성과를 되새김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를 만끽하는 것은 어떨까?

■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문과)는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 - 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드라마평론가와 MBC-TV 옴부즈맨 프로그램 < TV 속의 TV> 전문 패널로 활동 중이다.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 TV드라마의 현실성 확보 방식 고찰>,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현재 원로 극작가 한운사 선생의 방송극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과 ‘한국TV드라마’의 미학적 특징을 밝혀 한류(韓流)를 뒷받침할 학문적 이론 정립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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