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없는 병원드라마' '병원의 권력 관계에 대한 본격적 분석' 등  드라마 <하얀거탑>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를 왜 권력의 화신으로 그리냐’는 의사들과 ‘그걸 이제 알았냐’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드라마 ‘리얼리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단다. 손님에겐 친절했다가 간호사에겐 잡아먹을 듯 이야기하는 의사(그나마 ‘불친절’에 익숙한 손님은 친절한 게 다행이라 생각하지만)를 보며, 갑-을-병의 관계와 의사 본모습이 혼란스러웠던 기자로서는 엉뚱하고 사소한 곳에서 이 드라마의 리얼리티에 대한 불만을 말하고 싶다.

   
  ▲ MBC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시민운동가로 나오는 이윤진(송선미 분)  
 
그건 다름 아닌 등장인물의 옷이다. 극중 ‘선함’을 대변하는, 외과과장 이주완(이정길 분)의 딸이자 시민단체 활동가 이윤진(송선미 분)의 옷 말이다. 2회에서 이윤진은 등판에 ‘내 권리는 내 손으로’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적힌 남색 조끼를 입고 등장한다. 시민운동을 10년 가까이한 한 여자 선배는 그 모습을 보고 “파업패션 아니야”라며 웃었다. 2회에서도 그녀의 사무실 동료들은 마치 유니폼처럼 이 조끼를 입고 대거 등장하는 낯설음을 연출했다. 노동자들이 파업 중에 단체로 남색 붉은색 조끼를 입은 것은 여러 번 본 적 있지만 2000년대 이후 시민단체 활동가가 유니폼처럼 일상적으로 조끼를 입고 다니는 걸 거의 본적이 없다. 

동아리 티셔츠나 학회 조끼를 입던 것이 나름 자랑이었던 90년 대 초반까지 대학에서 주머니 주렁주렁 달리고 구호 시원하게 적힌 등산조끼 패션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끼 패션은 동아일보가 최근 현대차 파업을 비판하기 위해 들고 나온 상징물인 ‘빨간조끼’(<특권의 상징 ‘빨간조끼’>, 1월16일자)에서 드러나듯 파업패션의 상징이 돼버렸다.

‘민복’이라 불리던 생활한복을 입는 사람을 운동권으로 여기던 시절은 지나, 이제 생활한복은 보통 ○○선원 수련생 패션이고, 잘못 입으면 한정식집 종업원 패션이 된다. 하여튼 시민단체 활동가의 리얼리티를 살리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시민단체라는 고정관념에 붙들린 나머지 세련된 스타일의 이윤진에게 노동자들이 파업 때나 입을 법한 조끼를 입힌 것은 자기 집에서 투피스 입고 사과 깎는 아줌마만큼이나 어색해보인다.
  

   
  ▲ 시민운동가인 이윤진과 동료들은 구호가 적힌 조끼를 입고 등장한다. ⓒMBC  
 
‘운동권 패션’을 이야기하자면 지난 2002년 방송된 MBC특집극 <순수청년 박종철>의 패션도 빼놓을 수 없다.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을 다룬 이 드라마는 87년 항쟁과 고 박종철 열사를 몰라도 꽤나 감동적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박 열사의 애인(그녀는 가상인물이다)으로 등장하는 여대생,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옷은 드라마로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다. 셔링잡힌 흰 블라우스와 시폰 소재의 흰 치마를 입고 나비처럼 긴 생머리를 나풀거렸던 그녀. 급기야 박 열사와 함께 간 농활에서는 반바지차림으로 ‘깜짝’ 등장했다.

90년도만 해도 남자가 반바지를 입고 농활을 가면 선배들에게 욕 들어 먹기 십상이었다고 하던데, 그 엄혹하고 보수적이었던 80년대 중반에 여대생이 반바지를 입고 농활을 가다니!!! 이런 식이라면 박종철 열사가 힙합 패션으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거창하게 말해, 청순가련한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빚어낸 리얼리티를 거스른 시대착오적 설정이고, 소박하게 말해 옥에 티인 셈이다.

다시 <하얀거탑>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주 방송된 3, 4회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이윤진이 입원하는 바람에 환자복차림으로 등장해 부담스럽던 조끼패션은 볼 수 없었다. 드라마 전개를 위해 계속 입원을 시킬 수도 없을 터이니 다음 회에서는 패션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면 ‘재활용도 브랜드 시대'(1월9일)라는 한겨레 기사를 참고하고, 그래도 모르겠거든 가까운 시민단체를 한 번 방문해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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