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계실 때 국가보안법 없애겠다고 하니까 한나라당에서 탈북 위장 간첩이 있는데 이래도 국보법 없앨거냐, 그렇게 탈북자 간첩 1호가 나왔다. 내가 그 1호다.”

19일 만난 이우성씨(가명)의 고향은 북쪽의 개마고원이다. 16살이던 1992년 8월 군에 입대해 군 생활만 7년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당시 ‘남조선이 이 틈을 타 모험을 감행할 수 있으니 경비태세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남쪽에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애도기간인데 우리가 누구와 싸우겠나.” 남쪽 보도는 종종 ‘유언비어’가 되어 북으로 올라왔다. “우리 금강산 댐 폭파시키면 남한이 다 물바다가 되고 우리는 쉽게 이길 수 있다더라”는 유언비어의 시작도 돌이켜보면 남쪽의 ‘평화의 댐’ 보도였다고 했다. 그는 “북쪽 당국도 인민들의 자신감 고취에 필요하니 그런 소문들을 단속없이 놔둔 것 같다”고 말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그는 ‘임무’를 받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연변 부근에서 남쪽 정보기관의 ‘공화국’ 모략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약 5년 간 체류했다. 그곳에서 쌀을 닭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조선이 못산다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란 걸 알게 된 후엔 북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씨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강조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중국인들 틈에서 이탈리아-한국 16강전을 봤다. 한국을 응원하는 중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안정환이 마침내 골을 넣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 “우스갯소리로, 안정환이 나를 한국에 보냈다.” 2003년 1월27일 한국에 들어와 하나원을 졸업한 뒤 정착했다.

1년 뒤, 그는 가족을 보고 돌아올 생각으로 다시 북으로 갔다. 북·중 국경지대에서 집까지 150km거리를 걸어갈 셈이었다. 하지만 압록강을 넘다 잡혔고, 살아남기 위해 남쪽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다시 북에서 임무를 받고 그는 다시 남쪽에 내려왔다. 그리고 2004년 5월, 자수했다. 

3개월간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를 받았다. 간첩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조사받는 기간 동안 일을 못해서 3개월 치 일당도 받았다. 그렇게 사건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4개월 뒤, 그는 느닷없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등장했다. 그것도 ‘간첩’으로. 

중앙일보는 그해 12월2일자 “북한군 보위사 소속 공작원 탈북자로 위장 간첩활동”이란 제목의 1면 기사에서 “(이씨가) 1년3개월간 국내에서 간첩으로 암약해온 사실이 드러났다”며 “간첩 혐의가 드러나 지난 7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고 보도했다.

▲ 2004년 12월2일자 중앙일보 1면.
▲ 2004년 12월2일자 중앙일보 1면.
그러자 국정원은 “이씨가 지난 4월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거쳐 몰래 입북하던 중 북 경비병에 체포돼 처벌을 모면할 목적으로 보위사 정보요원임을 밝히고 당초의 지시를 어기고 한국에 들어간 것을 사죄하면서 국내 있을 때 얻은 ‘하나원’ 시설 등에 대한 내용을 북에 제공했다”고 해명하며 중앙일보의 ‘위장탈북’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련 기사는 한 달 간 이어졌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공동대표였던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는 당시 미디어오늘에 “간첩활동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간첩이라고 하기 어렵다”며 “이씨 개인은 매우 불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당시 정치권은 국보법 폐지여부가 최대 쟁점이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국보법 폐지안을 국회 법사위에 상정했고 한나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씨는 국보법 유지를 위한 여론몰이에 좋은 소재였다. 언론은 “탈북위장간첩 1호”라며 떠들었다. 

이씨는 당시를 가리켜 “한 달 간 내 이야기가 기사에 나갔다. 집에도 못 들어갔다. 누군가 국보법 없애는 걸 막으려고 나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이 전여옥씨였다는 것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언론으로부터 잊혀진 뒤, 그는 더욱 방황했다. 자신을 간첩으로 만든 그 악의적인 기사를 썼던 기자를 죽일까도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는 간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제대로 사과한 언론은 없었다. 

그가 15년 만에 다시 언론 앞에 섰다. 언젠가 국보법 폐지 논의가 시작되어, 또다시 자신과 같은 보도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씨는 “남한 언론, 특히 조중동에서 누가 북에 가서 확인할 수 없다는 핑계로 마음대로 북쪽 기사를 쓴다”며 오늘날의 북한 관련 보도 또한 비판했다.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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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한국당 사라지지 않는 한 5·18 가짜뉴스도 사라지지 않을 것”

그는 남쪽을 선택했지만 북쪽을 왜곡하는 보도 또한 참기 어렵다고 했다. 예컨대 그는 탈북하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연좌제로 죽임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간다는 식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상식적으로, 다 죽이면 남아있을 사람이 없다. 1년에 (남쪽으로) 1000명 정도 넘어온다. 그 가족들 다 없애면 1년에 1000가족씩 없어지는건데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가족들 고통 크게 없다. 북쪽 당국에서 탈북자들이 (북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는 걸 안다. 일종의 외화가 들어오는 건데,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것이다. 옛날처럼 죽이거나 그런 게 아니다.”

이씨 역시 여전히 북에 가족이 있다. 이씨도 가족에게 송금을 한다. 중국의 브로커에게 돈을 보내면 브로커가 이 돈을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다. 이 과정에서 수수료를 떼어 가는데 한 때는 30%였고 지금은 더 올랐다고 했다. 북·중 접경지역에서는 짧게나마 가족과 통화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반영된 기사는 찾기 어렵다고 했다.

반면 언론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의 메시지는 한결같다. “고위급 탈북자는 국정원이 먹여 살린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는 순간 밥줄이 끊긴다. 인텔리는 금방 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는 언론에 등장하는 일부 탈북자들 발언은 대부분 ‘생계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접했던 가장 황당한 북쪽 보도로 ‘장성택 사망’을 꼽았다. “죽인 건 맞다. 그런데 기관총으로 쐈다? 기자가 그걸 직접 봤나? 그건 우리가 봤을 때 말도 안 된다. 우리가 쏘는 총알 한 발이 북에선 닭 한 마리다. 북쪽 군인들이 1년에 총을 많이 쏘면 20발 쏜다.” 

그는 장성택 기관총 총살보도가 “북의 잔혹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보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일보의 ‘현송월 숙청’ 보도를 예로 들며 남쪽 언론이 일종의 ‘숙청 기사’를 쓰고 당사자들의 ‘생존 신고’ 이후에도 오보를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척 가만히 있다고 비판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그는 이처럼 일방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북쪽 보도가 나오는 이유가 “통일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의 5·18 북한군개입설 가짜뉴스의 목적도 이와 같다며 “자유한국당이 사라지지 않는 한 5·18 가짜뉴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은 다양성을 존중하니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세력(자유한국당·보수언론)의 힘이 약해져야 한다”고 말하며 한국의 뉴스수용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말을 가려들어야 하는데 이쪽(남쪽) 사람들은 너무 세뇌되어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어 “북쪽을 악마화 하는 게 보수언론”이라며 문재인정부가 보수언론을 가만 놔두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북핵보도에 대해서도 좀 더 복합적인 배경을 언론이 감안해야 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정은은 유학을 다녀왔고, 자기 나라가 못 사는 걸 알고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미국 제재 때문에 그게 안 되는데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한다. 북쪽이 사실 중국 러시아 일본을 의식해서 핵무기를 갖고 있는 측면이 더 크다. 이걸 미국이 이해해줘야 한다. 특히 북쪽은 중국을 적국으로 인식한다. 북쪽이 제일 불신하는 게 중국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중국 때문에 당한 게 많아서다.”

그는 현재 한 지방에서 월급받는 평범한 가장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북쪽 보도의 문제점과 북쪽의 현실을 알리는 일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다. 오늘도 그의 소원은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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