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사장이 들어선 지상파 방송사 ABC에서 탐사 고발 프로그램 ‘딥뉴스(deep news)’가 폐지됐다. 여권의 핵심 대권 주자인 여성 정치인 조경혜씨 조부의 친일 행적을 보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권력의 눈 밖에 난 전하영, 윤동우, 현종민, 조승헌 기자는 하루아침에 해고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잃어버린 9년’을 겪은 언론인이라면 익숙한 서사가 소설로 재탄생했다. 20년 간 YTN과 MBC 기자로 일하며 언론 탄압을 직접 경험했던 안형준 방송기자연합회장은 소설가 김진명의 말처럼 ‘허구라는 장치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고자 소설 ‘딥뉴스’를 썼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딥뉴스’는 지난 2010년 ‘MB 낙하산’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첫 개편에서 사라진 MBC ‘뉴스 후’(후 플러스) 폐지 과정을 기반으로 했다. 지난 9일 미디어오늘과 만난 안 회장은 “학습 능력이 진화하는 인공지능 ‘딥 러닝’에서 차용해 ‘진화하고 발전하는 탐사 뉴스’라는 의미로 ‘딥뉴스’를 제목으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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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해직 언론인들의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해직 언론인들의 이름은 실제 MBC와 YTN 해직자들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왔다. MBC 최승호·강지웅 PD를 합쳐 최지웅, YTN 현덕수·노종면 기자를 합쳐 현종민이 되는 식이다.
해고된 뒤 집에 돌아온 기자에게 아들이 달려와 ‘아빠 짱이야. 아빠가 검색 순위에서 아이돌보다 앞섰어’라고 말하는 에피소드는 MBC 박성제 기자 사례이며, 파업 중 한 그룹 인사로부터 임원직 제의를 받았다 거절한 사례는 안 회장 본인 이야기다.
안 회장은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오히려 ‘논픽션’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파업을 할 때면 사측에서 ‘파업 안 하면 특파원 보내줄게’, ‘정치부장 시켜줄게’, ‘앵커나 진행자 시켜줄게’라는 이야기를 한다”며 “파업을 접는 인원은 알짜배기 보직 숫자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증’이 없기에 시사나 다큐멘터리로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론계 안팎에서 의혹이 불거졌지만 기사화나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야기도 이번 소설에 담겼다. 여권 핵심 정치인의 출산과 숨겨둔 딸에 대한 탈법적 지원, 일본 오사카에 땅이 있다는 또 다른 정치인, 재산이 없다던 전직 대통령 아들 소유의 미국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등이다. 소설 속 취재 조력자로 등장하는 안재용은 실제 재미 언론인 안치용을 모델로 했다.
실제 사례와 다른 극적 장치들도 눈에 띈다. 여성 직원들이 응대하는 고급 룸 카페 직원이 ABC 기자들 취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일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 등이다. 안 회장은 “처음에 대중적인 드라마를 염두에 뒀다. 그러다보니 소재가 통속적이고 선정적으로 흐르게 된 측면이 있다”며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이나 ‘공범자들’ 같은 비상업적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파업 언론인들이 승리하는 결말 또한 ‘판타지’라고 설명했다. ABC 기자들의 보도가 이어지자 정치인 조경혜는 결국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다. ABC에는 낙하산 사장 대신 새 사장이 취임한다. 하지만 조경혜는 대권을 향한 꿈을 접지 않고 신임 ABC 사장은 ‘해직자들의 조건 없는 복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직자들은 독립 언론 ‘딥뉴스’를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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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ABC와 달리 MBC 해직자들은 원래 자리를 찾았고, 해직자 가운데 한 명인 최승호 PD는 MBC 사장으로 사내 개혁 중이다. 반면 YTN 언론인들은 해직자들이 복직한 후에도 최남수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60일 넘게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
안 회장은 “YTN 공채 1~3기는 YTN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크다”며 “기존 방송사들이 뉴스를 특정 시간대에만 내보낼 때 YTN은 방송사 최초로 모든 뉴스를 신속하게 보도했다. 1997년 정권 교체 때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YTN 언론인들이 지금도 파업을 하고 있지만 조만간 승리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동료들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