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史,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家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家 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편집자주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왜 삼성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史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년 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재벌

1980년대는 과도기였다. 정치적으론 군사 독재정권에서 시민정부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시기였고, 경제적으론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도입기였다. 정치적 전환 변곡점은 1987년 시민혁명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7년 동안 국민들을 강압적인 폭력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한국인은 자유롭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게 됐다. 정치적 자유화인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적 체제 변화는 시민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미국에 의한 외압 때문이었다. 한-미간 무역거래에 있어 미국의 적자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1985년 한국정부와 미국 통상대표부는 한국의 금융, 보험, 광고, 영화 시장 개방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경제가 세계 경제 자유화 흐름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 다음해부터 한국정부는 보험업과 증권 등 금융업과 영화와 광고 등의 미디어 시장을 개방했다. 경제 중심축이 정부 주도형에서 시장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Sa, 1993).

사실 한국 시장 개방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자발적 협력도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을 승계할 수 없었다. 그동안 금전적 물적 자원을 지원해 줬던 미국과 일본이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국가들은 불황 타개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시장 중심 경제구조를 말한다. 대표적인 정책들은 공기업의 사기업화, 금융시장 활성화, 소유 지분 완화 및 기업의 인수 합병 (M&A) 활성화 등이다. 미국과 영국은 또한 이 같은 경제 개방화 조치를 아시아국가도 요구했다. 자국의 기업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Harvey, 2005). 이 같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려 했다.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위해서였다. 전두환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시장주의자들을 경제 관료로 임용했다. 이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 축소, 기업 활동 자유 보장, 금융 자유화 그리고 공공 부문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다 (Kim, 1999).

▲ 1985년 4월26일 미국을 방문중인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백악관 발코니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 1985년 4월26일 미국을 방문중인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백악관 발코니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1980년 중반 통상 협상을 통해 새로운 민영 방송국 설립, 외국 광고대행사의 자유로운 영업활동 보장, 헐리우드 영화의 직접 배급 등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같은 미국 측의 요구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정부는 SBS 등을 포함하는 민영방송국을 추가로 허가했고, 다국적 광고대행사들과 헐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자유롭게 영업 활동을 하게 됐다(Kim, 1996). 이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 정권 때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4년 쌀 시장을 개방했고 1995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 독점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특히, 재벌들은 외국 은행에서 차관을 직접 들여와 금융 계열사를 설립하고 국민들을 상대로 이자 장사를 했다. 또한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중화학 공업, 반도체 그리고 자동차 산업에 진출해 한국 경제 부실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무분별한 경제활동을 제재할 수단이 없었다. 독재 정권 시절의 ‘강한 정부-약한 재벌’의 권력 관계가 민주 정부시절엔 ‘약한 정부-강한 재벌’로 역전된 것이다 (홍덕률, 2006). 한마디로 1990년대는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통제하는 재벌공화국 시대였다.

금융 자유화와 삼성가의 편법 상속

경제 자유화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삼성의 통치권은 설립자 이병철에서 이건희로 교체됐다. 이병철 삼성 창립자는 1987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삼성은 32개의 그룹 계열사, 종업원 15만 명, 11조 원이상의 자산에 17조 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12월1일 그룹 회장 직을 승계했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당면한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 발굴과 형제들 간의 상속 문제였다.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유통, 종합화학, 영화-영상사업, 인터넷 등의 사업 분야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특히 삼성자동차는 1999년 법정관리로 넘어가면서 약 4조5천억 원의 부채까지 남겼다. 자산 매각을 통해 2조 원 정도의 부채는 상환했지만, 나머지 약 2조5천억 원을 갚아야했다. 이처럼 이 회장의 경영실적은 탁월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삼성전자를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켜 세계인의 머릿속에 삼성을 각인시켰다.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은 이병철과 비슷하다. 그룹 비서실 (또는 구조본부)을 통해 수렴 청정하는 방식이다. 그룹의 장기적인 밑그림과 자금운영은 비서실에서 총괄하도록 하고, 정기적인 그룹 사장단 회의를 통해 계열사 업무를 보고 받았다(선우정, 2000).

▲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이건희 회장의 또 다른 임무는 가족 간의 상속 문제를 무난히 처리하는 거였다. 그는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그가 낸 상속세는 150억 1800만 원이었다. 삼성 자산 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상속세금을 냈지만 위법 사항은 아니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아들에게 넘긴 자산은 237억 원 2300만 원과 몇 개의 공익재단이었기 때문이다(권영준, 2005). 공익재단에 대한 세금 규정이 없는 점과 재벌 총수가 그룹 경영권을 통제하는 한국 재벌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세금을 아낀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세금을 적게 냈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법적 처벌 사항은 아니었다.

선대 회장은 공익재단을 이용해 절세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금융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 부자의 상속 방법은 달랐지만 법의 허점을 이용, 상속세를 적게 냈다는 공통점은 있다. 선대회장 보다 이건희 회장의 상속 문제는 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출자순환구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삼성 그룹을 6개 범 삼성가로 나누고 그의 자녀들에게도 경영권을 세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범 삼성가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한 특수 관계인들이다. 이병철은 1987년 1월 일본 동경으로 6명의 사람을 부른다. 동경 6인들은 큰 딸인 이인희, 작은 아들 이창희, 셋째아들 이건희, 장손자 이재현, 그리고 막내 딸 이명희 등이다 (정혜연, 2012, p. 200). 특수 관계인은 그룹 창업자의 배우자, 6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들을 특수 관계인으로 명명한다.

삼성을 분할하는데 있어서 이학수 등 구조본부 사람들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재무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중핵기업들에 첨단 금융기법을 접목시켰다. 대표적인 중핵기업은 에스원, 엔지니어링, 제일기획, 서울통신, 에버랜드 그리고 SDS 등이다. 활용한 금융 기법은 사모전환사채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다. 정부가 기업들의 자금 조달 편의성을 위해 1990년대 도입했다. 삼성은 주식 상장을 앞둔 중핵기업의 CB와 BW를 상속 수단으로 활용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비상장 주식이 장외시장에서 거래돼 소득이 발생할 경우 시세차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하지만, 상장 주식의 경우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삼성의 행위는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삼성비서실의 종자돈 불리기(1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 장악하기 (2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인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 SDS의 CB나 BW를 저가로 인수하는 단계),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지배구조의 강화 및 안정화(4단계), 차기 경영 전면에 등장 및 황제이미지 구축하기 등이다 (조승현, 2014, p. 274).

▲ 2013년 5월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 연합뉴스
▲ 2013년 5월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 연합뉴스
1990년대 삼성에버랜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그룹 내 부동산 관리회사였던 중앙개발에서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한 이 기업은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였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그의 자녀들에게 약 61억 원을 증여했다. 증여세금 약 16억 원을 내고 남은 돈 46억 원으로 주식 상장 직전인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구매했다. 상장되자마자 주식을 되팔아 450억 원을 만들었다. 이 돈을 종자돈 삼아 회장 자녀들은 에버랜드와 삼성전자, 그리고 제일기획에서 발행한 CB를 대량 구입한다. 다른 주주들은 대부분 신주 인수를 포기한다. 그 결과, 아래 표에서 보듯,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 3명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이 회사는 삼성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이므로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들은 16억 원의 세금만 내고 삼성을 상속 받은 셈이었다. 왜냐하면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베랜드로 돌고 도는 순환 출자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 일가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세습하고 통제권을 확보하는 행위는 현대, SK, LG 등 다른 재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조승현, 2014).

▲ 표) 삼성 에버랜드 주식 내부 지분 변동
▲ 표) 삼성 에버랜드 주식 내부 지분 변동
특히, 표 내용 중 중앙일보와 이재현, CJ의 지분 변동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6년 중앙일보 사장이었지만 그의 지분은 1%도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이건희 (26.44%)였다. 나머지 중앙일보 지분은 이 씨의 형제들과 삼성 중핵기업들이 공유했다. 홍석현씨나 그의 형제들 이름은 명부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1996년부터 벌어졌다. 중앙일보는 삼성 에버랜드의 신주 CB 인수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 자격을 상실했다. 심지어 1998년에는 에버랜드 주식이 하나도 없다. 1년 뒤 1999년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했다. 보광 그룹과 함께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홍석현이었다. 그의 지분은 1997년까지 1%미만에서 1999년 21.51%로 증가했다(최경운, 2005, p. 205). 삼성에버랜드와 중앙일보 지분이 맞교환 됐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분가 이후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홍석현 등 홍씨일가다. CJ와 이건희의 큰 조카 이재현도 살펴보자. CJ는 1997년 삼성에서 정식 분가했다. CJ는 다른 주주들과 달리 삼성에버랜드의 CB 발행 신주를 유일하게 인수했다. 그 지분을 2010대 초반까지 갖고 있었다.

▲ 2013년 5월4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다. 홍라희 여사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 2013년 5월4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다. 홍라희 여사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이런 식의 주주 맞교환 형식을 통해 이병철의 삼성은 6개의 범 삼성가 그룹으로 확대됐다. 이인희씨는 삼성으로부터 전주제지 등의 제지사업과 통신장비계열사를 인계 받아 1993년 분가해 한솔그룹으로 독립했다. 이창희씨는 VCR 등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기업과 한일합섬을 상속받아 새한그룹으로 독립했다. 이건희는 핵심사업 영역인 전자, 금융, 제조, 의류, 서비스 관련 계열사를 그대로 상속받았다. 이재현은 식품업 위주로 상속 받아 CJ 그룹으로 1997년 독립했다. 이명희는 1999년 백화점 등 유통업 계열사를 갖고 1999년 분가했다. 이건희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9년 중앙일보 그룹으로 분가했다. 이들 범 삼성가 그룹들 중 새한 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시장에서 선두 기업들이다. 이들 모두 한국 광고 시장을 떠받치는 광고주들이다. 이중 삼성, 중앙일보 그리고 CJ 그룹이 분가 이후 정보와 대중문화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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