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14일 ‘탕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신문 지상에서 접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나온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의 1987년 1월17일자 기사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를 읽고 또 읽으며 몇 날 며칠을 울컥거렸는지 모른다. 이런 기억 탓에 영화가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평정을 잃었다. 그때 그 안타까움 때문인지, 이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다짐 때문인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울먹였다.
영화를 보고 난 문재인 대통령은 가장 울림이 컸던 대사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를 꼽았다고 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세상이 바뀌겠느냐는 핀잔을 뚫고 세상을 바꾸자 노력한 끝에 드디어 세상을 바꾸어냈다는 희열감에서가 아니다. 문 대통령이 이 말을 가장 울림이 큰 대사로 뽑은 이유도 세상을 바뀌었음을 자축하자, 누군가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바뀌지 않았는가를 말하려고 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실제로 북핵과 같은 대외적인 문제로부터 적폐청산이라는 대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문 대통령도 걱정해 마지않을 중차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쩌면 앞으로도 예전처럼 그렇게 뚜벅뚜벅 함께 걸어가자는 제안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까지보다 더 크고 험한 장벽을 만났을 때 어떤 누구도 나서지 않으며 그런 일에 괜히 나서지 말라는 냉소가 횡행하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나 혼자서라도 뚜벅뚜벅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자는 제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혼자라도 뚜벅뚜벅. 말은 참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영화 ‘공범자들’에서 김민식 MBC PD가 한 인터뷰 내용은 혼자 뚜벅뚜벅 걷는 일이 얼마나 비장한 일인지 잘 보여준다. MBC 본사 건물에서 “김장겸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을 김 PD가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이것을 본 김 PD의 아내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며 울먹였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까지 외쳤는데도 주위 동료들이 아무 반응이 없다면 당신만 ‘돌아이’가 되는 거야.”
과거의 제자리로 아니라 새 환경에 걸맞은 새 모습이 정상화
현재 언론계가 당면하고 있는 적폐청산이라는 과제는 어떤 성격의 일일까? MBC는 정상화의 초석을 깔았다고 하고 KBS도 강규형 이사를 해임함으로써 새로운 경영진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적폐청산은 끝이 보이는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흔히 내 안의 적폐를 청산해야 하고 조직 내부에 깊숙이 침투해 있어 보이지 않는 문화적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옳다. 사람을 바꾼다고 절로 적폐가 청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생각과 문화를 바꾸어야 제대로 적폐를 청산할 수 있다.
그런데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와 싸워야 하는 적폐청산은 이유 없는 해고를 남발하는 몰상식한 상대와 싸우는 일에 비해 수월할까? 혼자 ‘돌아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느끼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일까?
기왕 두려운 마음을 이기고 이까지 온 거, 게까지 가봐야 하겠다.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