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입사 1년 만에 세상을 떠난 고 이한빛 PD 역시 이런 극강의 노동 현장에 내쳐진 신입 사원이었다. 취재 도중 만난 고인의 친구는 “학생 때부터 비정규직과 청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드라마 속 판타지로라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었다”고 전했다. 이한빛 PD의 첫 드라마 ‘혼술남녀’는 그가 꿈꿨던 바로 그런 드라마였다. 하지만 청춘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현장에서 그의 역할은 다른 청춘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촬영장에서 스탭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 하루 20시간이 넘는 노동에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불러내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하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이한빛 PD 유서 발췌)자신이 꿈꿔왔던 현장에서 “가장 경멸하던” 가해자가 돼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고인은 작품 초반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된 외주 업체와 계약직 스태프들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것 없었던 노동 환경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했던 현장에서 그는 자신의 ‘정규직 PD’라는 신분에 안도하기보다 절망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고인의 죽음이 알려진 뒤 ‘혼술남녀’를 통해 울고 웃었던 많은 시청자는 뒤늦게나마 “내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 드라마가 다른 누군가의 잔혹한 하루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현실을 잊게 하는 따스한 드라마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당연한 현실을 원한다”며 제작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CJ E&M은 유가족 등이 포함된 ‘tvN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배제한 채 진행한 자체 조사 결과를 근거로 “다른 드라마와 비슷한 정도의 강도였다”면서 오히려 이한빛 PD의 지각 등 근무 태만을 지적했다. CJ E&M이 요구하는 인재상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두 달여의 시간 동안 단 2일의 휴식, 하루 평균 4.5시간 취침(대책위 조사보고서)하고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을 정도의 ‘강철 체력’이었나보다. 대기업 CJ E&M이 아직도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고인의 어머니 김혜경씨는 “성실하게 사는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죽음을 택해야 하는 회사와 사회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동생 한솔씨도 “누군가가 죽어야 바뀌는 세상도 슬프지만, 죽어도 바뀌지 않는 세상은 더 슬프지 않나”라며 이제라도 CJ E&M이 제대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주길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