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새벽, 박근혜 생가터 표지판이 붉게 물들었다. 표지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부터 지역 기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언젠가는 훼손이 될텐데”란 말이 자주 나왔다. 간혹 늦은 밤 인근에서 퇴근하는 기자는 ‘혹시나’ 하고 괜히 표지판을 경유해 귀가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표지판을 붉게 물들인 사람은 사흘 만에 붙잡혔다. ‘열사(烈士)’가 아니냐, ‘의사(義士)’가 맞다. 다시 기자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충격은 대구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았다. 취재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동성로 번화가에서 열리는 각 단체, 정당별 시국선언 기자회견 풍경이다. 무슨 이야길 해도 ‘쌩’ 지나가던 시민들이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박수를 치기도 한다.

변화는 학생들부터 시작됐다. 중·고등 학생들은 누구보다 빠르고, 민감하게 비상식적인 상황을 인식했고, 분노했다. 분노의 기저에는 세월호가 자리한 듯했다. 스스로 무대에 오른 학생들은 하나같이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언니, 오빠, 형, 누나를 언급했다.

학생들이 분노하면서 그 또래 아이를 둔 부모도 함께 거리로 나섰다. 2차 시국대회서 무대에 오른 40대 남성은 “무심하게 박근혜에게 한 표 던진 한심한 어른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고, “정치에 등 돌린 무관심이 최순실이란 괴물을 키웠다. 어른의 잘못”이라고 고백했다. 30~40대 시민들의 민심 이반도 분명하게 감지됐다.

관건은 60대 이상에서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5차까지 이어지면서 시국대회 참여자는 급속히 늘었다. 시국대회 장소도 더 넓은 곳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늘어난 참여자들 속에서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60대 이상 노년층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박근혜 지지 어르신 만났냐”는 물음이 오갔다.

4차 시국대회, 작정하고 노년층을 찾아다녔다.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난 69세 남성은 “근본적으로 새누리당에 적개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 만난 72세 남성도 “평상시 새누리당에 불만이 있다”고 했다. 그 옆에 있던 65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어떡하나, 고민하는데 대회장 한 켠 인도에서 조용히 촛불을 든 어르신이 눈에 띄었다.

박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84세 남성은 “집에 가만히 있으면 국민 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처음 집회에 나왔노라고 했다. 쑥스러워하던 그는 말문이 트이자 왜 박 대통령이 퇴진해야 하는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1960년 4·19혁명, 1979년 10·26사태도 온몸으로 겪은 그가 보기에도 대통령은 “끝을 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대혼란에도 대한민국은 건재했다. 대한민국 기본체제가 완벽한데, 대통령 어떻게 된다고 잘못될 것 없다. 나라 근간을 믿는다”며 국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다. 그 또래 세대가 공유하는 이른바 ‘국가관’을 들으면서 ‘아, 이건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문시장에 불이 났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시장을 방문해 피해 상인을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흘리면 대구, 경북 60대 이상 노년층 마음은 바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난 2일 대통령 방문은 우려를 불식시켰다. ‘대통령의 10분’은 오히려 분노만 키웠다. 대통령 방문 직후 63살 남성은 취재진 앞에서 대통령을 성토했다. 그는 새누리당 대구시당 고문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월1일 오후 대구 서문시장 화재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변화의 징후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변화가 지속할지 확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대구의 변화를 받아 안을 정치세력이 없다. 촛불을 지키는 것에는 관심 없는 정치인과 그를 따르는 ‘팬덤 정치’만 있었고, 대구에선 환영받지 못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5차 시국대회에 뒤늦게 등장해 가장 앞자리를 차고앉았다. 녹색 깃발까지 나부끼면서. 기자들이 무대를 가리고 안 전 대표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뒤늦은 참석인 데다 시국대회 진행에 지장이 생기자 시민들이 항의했다. 깃발은 내려졌고 사회자는 “광장의 주인은 안철수 의원이 아니라 대구 시민”이라고 외쳤다.

▲ 이상원 뉴스민 기자
그보다 앞서 지난달 21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대구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지지자도 함께했다. 문 전 대표가 떠나자 따라 집회에 참석한 지지자들은 썰물처럼 현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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