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회고록’ 논란이 이어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2002년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일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새누리당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내용을 두고 ‘북한과 내통했다’는 공세를 연일 이어가고 있다. 이에 야당은 2002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을 거론하며 맞받아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내통’이라면 직접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박근혜 대통령도 ‘내통’한 것이냐는 문제제기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는 18일 의원총회에서 “SNS를 보면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접촉 경로는 무엇이며 또 4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가? 또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에 방북해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 온갖 칭송을 늘어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이야기한다”며 “(새누리당은) 이것을 대통령에게 ‘내통’이라고 한번 해보시라. ‘대통령님, 내통하고 오셨습니까?’라고 한번 해보시라”라고 말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18일 ”저는 국민의정부에서 당시 박근혜 야당 대표가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나눈 대화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다 이야기할 수도 있다’던 박 위원장은 19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그러한 내용을 지금 공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 2002년 박근혜 의원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나 찍은 사진.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과정은 박 대통령이 2007년 7월 펴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자세히 등장한다. 이 책에서 박 대통령은  2002년 5월 11일 베이징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보낸 특별기를 타고 평양으로 향한 상황,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하자 공항에 환영인파가 넘쳐난 장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5월 13일 저녁 머물고 있던 백화원 영빈관에 돌연 나타난 김정일 위원장과 대담을 한 상황에 대해서도 묘사했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화법은 인상적이었다”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등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박 대통령은 또한 “김정일 위원장과 나는 많은 약속을 했다. 그동안 중단됐던 남북축구대회 등 스포츠교류를 통해 서로 화합의 장을 열자는 약속도 얻어냈다”고 밝혔다.

정몽준 전 의원의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에도 남북관계와 통일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에 관한 일화가 등장한다. 2002년 9월 남북축구경기 도중 박근혜 의원은 정몽준 전 의원에게 “관중들이 한반도기를 들기로 했는데 왜 태극기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한국 응원단인 붉은악마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외치자 “왜 ‘통일조국’을 외치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18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이 같은 일화를 언급하며 “우리가 태극기를 흔들지 말게 한 박 대통령에게 색깔론을 제기해야 하느냐. 저희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충정에 의해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이명박보다 남북관계는 잘하겠지’라는 기대를 받았다. 2002년의 박근혜 의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대북전문기자인 남문희 시사IN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을 잘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굉장히 실망스럽다”며 “(이명박 정부보다) 잘하리라고 봤다. 박 대통령은 2002년 직접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북한과의 인맥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높게 평가했으며 통일을 강조했던 2002년 박근혜 의원의 모습은 지금 박 대통령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이래 “지속적으로 압박하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며 북한을 상대로 단호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8월15일 경축사에서는 “통일시대를 열어가는데 동참해 달라”며 북한 주민에게 탈북을 추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2002년의 박근혜 의원은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어색한 점 투성이다. 정한울 전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이 2010년 저서 ‘박근혜 현상’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02년 박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지금 우리가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아니었다.

2002년 4월 EAI 여론분석센터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박근혜 의원은 이회창, 노무현 후보와 3자 대결 구도 하에서 평균 12.3%의 지지를 받았다. 박근혜 의원은 여성(14.7%), 20대(16.6%), 고졸(13.6%), 대졸(12.6%), 대전‧충청(21.2%), 강원(21.1%), 무당파 (15.5%) 등에서 평균 지지율을 상회한 ‘제3후보’였다. 흔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통적인 지지층으로 알려진 영남-보수-고연령-저학력 층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2007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2007년 8월 EAI 여론분석센터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의원은 전국 평균 25.8%를 받았다. 여성(30.2%), 50대 이상(33.2%), 대구‧경북(43.0%), 충청(34.2%), 부산‧울산‧경남(32.8%), 보수층(30.8%)에서 평균 지지율을 상회했다.

흔히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을 꼽지만, 박 대통령이 처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지지층의 탄탄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한울 전 부소장은 “보수, 영남 중심의 강한 지지층 결집은 2004년 탄핵 이후 당 대표로서 당의 위기를 추스르고 당시 참여정부와 국가정체성 투쟁 과정(국가보안법 반대)을 주도한 박근혜의 정치행보와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2002년의 박근혜 의원은 제3후보이자 중도층의 지지를 받은 정치인이었고,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관계와 통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정치인이었다. 2002년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인 박근혜를 지지할 수 있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 NLL 대화록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30일 정청래 민주통합당 의원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비밀회담을 가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회담 내용을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콘크리트 지지층을 등에 업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위기 때마다 북한 카드를 꺼내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말 NLL 대화록 논란이 터졌고,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이 한창이던 2013년에는 ‘국정원 발’ 통합진보당 간첩사건이 발생했다. 2016년 총선 직전에는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했다.

임기 말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의혹과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나오며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은 사실상 깨졌다. 지지율은 26%까지 내려갔다. 새누리당과 정부는 이 상황에서 다시 ‘송민순 회고록’을 토대로 한 북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18일 ‘2002년 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 내용을 공개하겠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야당이 할 일은 야당이 알아서 하고 우리는 일단 우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떠올려야할 2002년의 기억은 단순히 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다는 것이 아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없던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 평화를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콘크리트가 이미 깨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종북몰이’는 지지층 결집이 아니라 각종 의혹을 덮기 위한 ‘물타기’로 여겨지고, 역풍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송민순 회고록 논란에 대한 공세가 이어지지만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그래서 최순실은’ 태그를 붙인 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당 의원이 아니라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 19일 당 대표 및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 간담회에서 한 경고다. “(회고록 논란을) 철저하게 규명하되, 우리당도 이 부분에서 너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할 부분은 아니다. 냉철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해서 다른 곁가지가 붙게 되면 팩트 자체가 본질을 흐릴 수가 있다. 여소야대 정국이라 하지만 국정에 대한 무한 책임은 우리 집권여당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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