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윤형님이 기고를 보내오셨습니다. 후속 기고와 반론을 환영합니다. - 편집자주.

아래는 관련 기고 묶음입니다.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 이선옥.
남성들이 "내가 언제 여성을 혐오했냐"고 묻는 이유 / 장슬기.
남성혐오라고요? 남 탓할 때가 아닙니다 / 이선영.
"넥슨 사태는 자본에 의한 페미니즘 탄압이다" / 김민수. 
"너 메갈이야?" 이 한 마디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나? / 김영환.
"메갈리아는 남성 혐오가 맞습니다"/ 박성호.
'페미나치'라고? 왜 ‘기울어진 운동장’을 못 보나 / 전지윤.
여성 78%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혐 범죄", 남성은 48% / 금준경.
남혐의 당위 인정하지만 혐오의 악순환 피할 수 없다 / 김시습.
반여성주의에 굴복한 정의당, 퇴행을 넘어 자멸로 가나 / 홍명교.
메갈리아 논란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불편한 진실 / 박가분.
여혐도 나쁘지만 남혐도 나쁘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 이정환.
메갈과 메갈4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 리 콜린.
나는 여성으로서 메갈리아를 거부한다 / 한혜수.


논의되어야 할 것들을 나열하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먼저 간단한 몇 가지 의견을 밝히고 넘어가자.

첫째, 나는 클로져스 성우에 대한 넥슨의 조치가 대중의 항의를 받을 만한 것이었고, ‘부당해고’라 칭해질만했다 본다.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의 언어를 담론적으로 해설하려는 이선옥과 박가분 등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지적하지만, 아마도 대중들이 그 성우가 프리랜서이며, 단지 계약해지를 당한 사람임을 몰라서 분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수사가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한 기업경영자를 학살자라고 기소한 것이 아닌 것처럼, 프리랜서에 대한 계약해지 사태는 ‘부당해고’란 수사로 비판받을 수 있다.

둘째, 또한 나는 그랬기에 정의당 문예위의 논평이 정당했다고 본다. 그리고 논란이 많은 사안에 대해 아예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논평의 철회는 어리석었다고 본다. 철회의 이유도 석연치 않았다. 다만 정의당 문예위의 논평이 ‘노동권’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이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같은 권리에도 동등한 발언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선 정의당이 과거 충분히 발언하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미래에도 그러지 못할 거라고 비아냥댈 수도 있을 것인데, 정의당에게만 제기할 문제는 아니고 시민사회의 논의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러한 논의의 결이 부족해 보여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일련의 상황은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매우 자연스러운’ 것들이 참으로 문제였다. 우리가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다.

1) 먼저 제1세계에서 가장 여성억압적이며 여성혐오(주창하는 이들이 말하는 바 ‘misogyny’)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메갈리아’와 같은 사이트가 발생한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본다. 이 사이트를 단지 ‘여성혐오 반대’ 사이트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남성혐오’ 사이트라 지칭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서구 페미니즘을 참조하면서까지 논의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는 보통의 페미니스트들이 편향적이거나 안이한 견해를 말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제법 복잡하고 논의를 위한 나 자신의 아직 숙고도 충분치 않다 보기에 이 글에선 서술을 생략한다.

2) 또한 이러한 사이트가 탄생했을 경우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나타날 거란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3) 그 와중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대중의 항의가 ‘메갈리아’에 대한 대중의 항의와 맞부딪히게 되었다. 양쪽 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담론이 대중의 자발적 행동에 착안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소비자행동의 양상을 취했다. 이 상황에만 집중해도 역시 복잡한 문제이고 긴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선 편의상 서술을 생략하겠다. 다만 진보담론이 이 갈등에서 ‘한쪽의 소비자행동’만을 문제시하는 건 매우 편향적이고 안이하다고 생각한다.

4) 결국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노동권’, ‘표현의 자유’, ‘소비자행동’과 같은 난립하는 개념들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균형선은 어디냐는 문제다. 그러나 페미니즘 진영 및 진보담론은 이러한 논의 자체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일련의 사건을 줄곧 ‘여성혐오자’(미소지니스트)와의 선악대결로 치환했다.

5) 그 와중에 ‘메갈리아’가 ‘일베’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이트라는 식의 앞뒤가 안 맞는 진실왜곡(한겨레 정희진 칼럼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차라리 저 ‘일베’의 자리에 ‘소라넷’을 집어넣었다면 이해할만한 소지가 최소한은 있다). 이러한 왜곡은 ‘메갈리아’나 페미니즘에 비판적인 이들이 담론적 언어에 너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수행될 수 있었다. ‘페미나치’란 말을 남발하는 그들의 빈곤한 언어는 ‘메갈리아’ 이슈를 추적하지 않은 이들에게 반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보면 실제로 ‘나치’이면서 ‘페미’였던 이도 존재하는데, ‘나치’임을 확인하지 않고 ‘페미나치’란 말을 쓰면 어찌 되는가. ‘진정한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식으론 이 땅엔 ‘진정한 좌파’도 ‘진정한 우파’도 없으며 심지어는 ‘진정한 파시스트’도 없다고 우길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오남용은 오히려 ‘페미니즘’이 다양한 이념과 결합할 수 있고 그에 대해 우리가 여러 의견을 낼 수 있다는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데에 이용될 가능성마저 있다.

6) ‘오늘의 유머’가 소비자행동을 넘어 정부 검열을 촉구하는 ‘예스컷’ 운동으로까지 나아간 것 역시 소비자행동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우기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논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부 웹툰 작가들이 소비자들에 대해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 한다손 쳐도, 창작자들에게 정당한 공포심을 심어줄 수밖에 없는 그릇된 행동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나는 메갈이다’와 같은 조류를 낳은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누군가는 이러한 그릇된 방향에 대해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다들 제동을 걸기 보다는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미소지니스트’와의 투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진보보다는 논쟁에서의 간편한 승리를 추구했던 탓이다.

그러니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도 이 ‘매우 자연스러운’ 상황들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한 몇 가지만 추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태 전반에 깔린 문제들 말이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진보담론은 이 문제를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의 무능은 보수담론도 문제를 방치하거나 (남초 커뮤니티) 대중추수주의로 흘렀을 뿐이기에 철저히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하 몇 가지 논점으로 진보담론이 ‘메갈리아 논쟁’을 다루는 데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글이 상당히 길겠지만 그럼에도 머릿속 생각을 다 적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양해를 구한다.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페미니즘에 해박하지 않으므로 이런 논점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급진적인’ 주장이 아니라 ‘온건한 ’주장을 하려 하고, 이 수준에서도 논의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고 있으므로 부득이 이 논점부터 시작하겠다. 나는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이라 생각한다. 짧은 견문으로나마 책에서 본 ‘래디컬 페미니즘’ 조류에 명확하게 부합한다 생각한다. ‘메갈리아’를 규탄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패륜적 사례’를 긁어모은다고 해봤자 그게 특출난 사례도 아니다. 서구권에선 남자들을 총 쏴서 죽여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실행한 사람들은 감옥에 갔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화를 내는 사람이 남성 뿐 아니라 여성 중에서도 있다. 이는 ‘메갈리아’나 그 옹호층들, 그리고 페미니즘 진영이 자신의 지향을 명확하게 서술하지 못하고 낭만화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메갈리아/워마드, 그리고 옹호층을 들여다보면 정서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맞는 거 같은데, 담론이나 지향은 ‘페미니즘 그거 좋은 게 좋은 거지’ 수준에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옹호층들은 “우린 별 것도 아닌데 왜 난리에요?”와 같이 반응하기도 한다. 그 말을 듣는 사람 입장에선 ‘어라. 별 거인 건 맞는 거 같은데 자기들이 그걸 모르나... 모를 수가 있나...’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또 페미니스트들은 메갈리아를 옹호하면서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한다. ‘좋은’과 ‘나쁜’이 애매한 어휘란 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이기만 하면 비판의 대상에서 면제될 수 있을까. 오히려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으며, 그중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에 대해 서로 토의하는 게 사회운동의 과정 중 하나라 서술하는 것이 더 건설적인 태도이겠다.

다른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페미니즘에는 많은 조류가 있으며, 그들은 서로를 비난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나는 페미니즘이 한국에서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그간 내내 불만이었다. 한국의 여성억압이 너무나 강고하며 페미니즘이 낙인의 언어로 기능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애써 이해해왔다. 옆에서 듣자면 양립하기 어려운 전혀 다른 논리를 내세우면서 신기하게도 ‘비페미니스트-남성’은 한목소리로 비난하는 세태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 한국 사회에서조차 페미니즘이 왕성하게 확장되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 ⓒ iStock
논의의 공전, ‘사회적 상식’의 형성방법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요즘 가장 뜨거운 ‘페미니즘’ 이슈로만 바라본다면 상당히 국제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향을 비틀어 다른 결을 살펴보려고 한다. 논의가 공전하는 이유를 들여다본다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상식이 형성되는 방식’의 문제가 있고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건드려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 건에선 다들 자신이 상식적이라고 믿는 이들이 상대방의 몰상식과 불통을 규탄하며 욕하고 있다.

여기서 아무도 거짓말 한 사람은 없다. 정말로 다들 ‘하던 대로’ 했다. 이를테면, 남초 커뮤니티의 주류인 ‘일베-메갈 동급론자’(‘일베’와 ‘메갈’은 같은 사회적 악이니 배제해야 한다는 견해)들은 일베에 대해 하던 대로 메갈에 대해 했다. 그런데 왜 나를 지지하지 않느냐고 한다. 진보담론이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베 배제’에 대해 딱히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적은 없지만, 제동을 가한 적도 없다. 이제 와 ‘메갈’을 “일베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유일한 당사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나오는 걸 보면,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일베’와 가장 적대적인 커뮤니티는 이번 문제에서 진보담론의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의 유머’였다.

반대편에선, 진보담론이 사회문제에 대해서 평소 ‘하던 대로’ 메갈에 대해 접근하는 광경이 있다. 그러니 진영 내에서 메갈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잡음이 나오면 당연히 왜 당신들은 하던 대로 우리에게 연대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과거부터 그 '하던 대로'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고 그 두 집단의 '하던 대로'를 비판하기 위해 제기할 수 있는 논점이 바로 이 글의 제목인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 문제라 본다.

‘기울어진 운동장’ 사회의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

이 개념은 반 년 쯤 전에 혼자 만든 것으로, 요즘 민주당 지지층부터 페미니즘 지지층까지 대단히 폭넓은 영역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의 오용에 대한 반박, 혹은 보충의 성격에서 나온 말이다. 가령 나는 한국 사회가 가장 여성억압적인 사회 중 하나라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지적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주장을 따른다고 해서 한국 사회에 대해 남성들이 제기하는 항의는 아무런 검토의 가치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강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역편향’도 있고,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후자(‘불균형 시정의 불균형’)를 위해 쓰기 시작했지만 페미니스트들에게 동의를 받기 가장 쉬울 남성차별 사례를 들기 위해선 전자(‘강한 억압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역편향’)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세상에는, 그리고 한국 사회엔 ‘여성혐오에 의한 남성차별’의 사례도 존재한다. 매우 극단적인 사례로 남성 간호사가 들어가면 ‘너 나가고 여자 들여보내’라고 말하는 환자들이 존재한다. 이건 너무 명확하게 ‘여성혐오에 의한 남성차별’ 사례다(그런데 이 건을 ‘여성혐오’가 아니라 ‘남성혐오’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가? ‘여성숭배’는 ‘여성혐오’의 한 양식일 수 있다면서, 그 역은 불가능할까? ‘여성혐오와 대칭적인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남성혐오는 없다’가 아니라 ‘여성혐오와 비대칭적인 남성혐오는 있다’로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랜 고민이지만 이 글에선 곁가지이기에 여기서 자름).

물론 이 건은 일부러 페미니스트들의 동의를 가장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 사례를 들었기 때문에, ‘그 문제야말로 페미니즘이 더욱 번성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라고 반박(?)할 수 있고, 나도 이 건에 대해선 동의가 가능하다. 일단 여기선 ‘남성들이 제기하는 항의는 아무런 검토의 가치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란 점만 확인하고 지나가자.

당연히 이러한 역편향은 매우 작은 계에서 발생한다. 당장 저런 일을 겪을 직종은 희소하다. 그보다 월등하게 많은 직종이 남성중심적이다. 그러나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누군가는 그 역편향계에 살아야 한다.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들이 일일체험식으로 돌아가면서 남성차별을 겪는다면 “그래봤자 364일은 이득을 누리고 살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게 365일 중 1일이 아닌 250일일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건도 사회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건들은 분명히 원칙적/이론적으론 페미니즘 담론이 다룰 수 있지만, 당장은 관심 밖에 있는 사안들이다. 특히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먼저 나서 다른 남성들의 목소리를 ‘더치페이나 찌질하게 요구하고, 국가에게 요구해야 할 군대 문제에 대한 분노를 여자에게 풀어내는 저능아들’이란 식으로 매도하는 것이 인터넷 세론의 현실이다.

‘남성’이 기득권 집단이기 때문에 이득을 본다는 말은 맞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득은 모든 남성 개인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불균형하게 분배되어 있고,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역차별을 당하는 남성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젠더권력을 사회관계로 도치하는 비유를 응용해보자면 –참고로 이런 종류의 비유는 언제나 비유차원에서만 머물러야 한다고 본다. 강자/약자 관계가 존재한다 한들 그 양상은 다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성/여성 관계와 이성애자/동성애자 관계조차도 양상이 매우 다른 마당에.) 마치 자본가/노동자의 차등적인 관계를 인정한다 한들, 얻는 소득을 노동시간만큼 나눠보면 최저임금만큼도 못 버는 영세자영업자들이 다수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베’ 배척은 어떤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을 보여줬나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을 보지 못하는 사회적 상식의 형성과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들어다보자. 페미니즘 이슈를 벗어나 ‘일베’ 이슈부터 시작해보자. ‘일베’ 유저를 배척해야 한다는 정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회적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국가기관의 영역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일베’를 한다 한들 KBS나 교사직에선 잘리지 않는다는 상황을 우리는 봐왔다(아마 여기선 정체를 들킨다면 사회주의자들이나 메갈이 더 잘리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를 묻게 된다.

1) KBS나 교사직에서 ‘일베’적 혐오발언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2) 인터넷에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일베’ 의혹에 대해 앞뒤 분간없이 난리를 치면 그 난리의 총량이 KBS 기자나 교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1)에 대해선 다시 말하기로 하고, 2)에 대한 내 대답은 명확하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시민사회적 상식’이 ‘국가권력’과 따로 놀고 있다. 시민사회가 국가를 구성한 게 아니라, 국가부터 마련해놓고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억지로 발달한 탓이다. 가령 공론장에 등장하는 판사는 문유석 밖에 없다. 판사들이 대체로 문유석 정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남한 사회에 그걸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들은 ‘간장 두 종지’ 칼럼을 쓴 조선일보 한현우 부장을 희대의 ‘꼰대’로 매도한다. 그 판단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평범한 기업체의 중년 남성 부장님들보다 특출나기는커녕 양호할 수 있다고도 본다. 남한 사회에서 권력기관의 많은 부분은 이처럼 ‘자기정당화가 전혀 필요없는 문맥에서 권력을 누리고’ 살아간다. 시민사회적 규제는 그 바깥에 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이토록 기울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선 가능한 한 반대편으로 기울이는 것이 정의라고 본다. KBS나 학교가 ‘일베’를 배제하지 않으므로 시민사회적 영역에서 있는 힘껏 그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여긴다. 어디서 숙지했는지 불분명한 ‘일베’ 용어 몇 개를 사용하는 정도로 홍역을 치르게 만든다. 비유하자면 국가에서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았더니 역사담론의 영역에선 친일파의 범위를 무지막지하게 확장시켜 놓은 것과 흡사하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뭐가 작동하는가?

‘줄다리기’ 모델의 문제점과 페미니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 거대한 사회를 ‘줄다리기’ 모델로 바라본다. 당신은 한 편에 서야 하며, 거기에 힘을 실어야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너무나 직관적으로 타당하게 들리기 때문에 온갖 복잡한 이론들도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는 이러한 모델을 논거로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 같은 제법 복잡한 이론들도 그렇다. 이쯤 되면 독자들도 눈치 챘겠지만 이 ‘줄다리기’ 모델이야말로 메갈리아 옹호에 최적화된 모델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옹호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자기변명적 언어도단이 된다. 즉 ‘기울어진 운동장’과 ‘줄다리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약자에 감정이입을 하며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을 조장하다가 자기가 그 일그러진 잣대에 피해를 볼 지경이 되어야 세상에 이런 것이 어딨냐고 진보담론이 부조리하다고 분노한다.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유명한 미드시리즈 <성폭력 범죄 전담반 Law & Order> 시리즈를 보았는가? 많은 여성들은 그걸 보면서 ‘한국 경찰’과 사뭇 다른 페미니즘적인/인권침해를 우려하는 서구 사회의 상식과 공권력을 찬양했다. 나는 보면서 반대로 ‘어라, 저 사람들이 하는 짓, 내가 교육받은 바에 의하면 다 2차 가해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가 여기서 말하는 2차 가해는 요즘 아무렇게나 쓰이는 용례처럼 “홍상수 김민희를 욕하는 나를 방해하는 니들도 2차 가해!!!”란 식의 와장창 논리도 아니고, 그냥 대학사회의 페미니스트들이 보통 사용하던 그 용례다. 그 미드에 등장하는 이들이 벌이는 모든 행위가 남한의 운동사회가 수용한 ‘페미니즘적 잣대’에 의하면 2차 가해로 불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피해자를 불러다놓고 당신 진술에 일관성과 타당성이 있느냐, 증거는 있느냐, 기억이 조작된 건 아니냐고 진실공방을 벌여야 한다. 가해자 측 변호사는 굉장히 반페미니즘적 논리로 공격을 하는데 그 공격을 앉아서 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범인을 잡아야 하고,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이를 입증할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얘기가 어떻게 될까?

1) 운동사회에서 ‘2차 가해’를 막는다고 확정되지 않은 가해자의 변명을 막는 방식은 정당했는가?

2) 운동사회 내부에서 이토록 ‘기울어진 잣대’를 적용하면 사회가 그에 반응하여 더 페미니즘적으로 이동하기는 하는가?

3) 설령 그렇다고 한들 ‘불균형 시정’을 만들어내 특정한 계에 형성된 ‘새로운 불균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와중에 상해입고 터져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행동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 우리는 모른다

여자가 남자를 때린다 치자. 이 행위에 대해 어떤 이는 ‘세상의 폭력의 양을 증대시키는 행위일 뿐’이라 보고, 다른 이는 ‘8만 년 동안의 여성억압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고 균형을 맞추는 행위’라고 말한다. 두 개의 극단이다. 이 중 뭐가 옳다 우길 생각은 없다. 세상일은 대개 단정적 재단보다 훨씬 복잡하다. 무슨 일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솔직히 우리는 잘 모른다. 이중 한쪽 측면만 옳다고 우기고 강요해선 안 된다.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이 앞에 있는 ‘불균형’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작은 섹터에서 다른 역편향을 촉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나는 ‘일베’가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에 대한 불균형’이었다고 정의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계속 말하고 있듯이 이 분석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아니다).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이란 개념을 떠올리자 나는 너무 많은 영역에서 이와 같은 예시가 떠올라 이게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가령 ‘남한 운동권의 전투성’을 얘기하면 남한 운동권들은 펄쩍 뛴다. 세상에서 가장 시위에 억압적인 전의경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그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의경의 존재가 남한 운동권의 전투력을 키워왔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합리적인 해석이다. 2000년대 중반, 홍콩에서 실린 반세계화 시위에 건너간 수백 명의 남한 운동권들은 ‘남한 운동권에 길들여진’ 전의경과는 전혀 다른 레벨의 홍콩 경찰을 유린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홍콩을 방문했을 때, 내 또래의 어떤 홍콩청년들은 “그때 한국 사람들이 경찰 털어버리는 거 보고 국가가 별 거 아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자유주의 원칙과 규제의 문제를 보면...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표현의 자유’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데,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규제를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듯한’ 이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 직관적 견해를 어떤 식으로 언어로 풀어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발전경제학자 장하준이 시장경제에 대해 서술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이 직관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물론 시장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층위가 다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비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장하준은 시장경제에 규제가 없다는 건 자유지상주의자의 환상이라 주장한다. 시장경제를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선 규제가 필요하며, 그게 시장주의자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저 그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란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장하준이 속한 학파를 제도주의라 부르기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를 응용하여 표현의 자유 얘기를 해보자.

내가 추구하는 자유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되도록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은 규제 위에 성립한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즉,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란 존재하기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대체로 과거에 비해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가 이상으로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오해라 본다. 사회 영역에선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가 실험된 적 없지만, 진보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의 영역에선 그런 실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실험의 일부는 여성혐오적 게시물을 견디지 못한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제기에 의해 무너졌다.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자가 아닌 진보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견디기 어렵다.

과거엔 이 문제에 대해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는 약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하는 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다음의 내용을 덧붙일 것이다.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는 약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향이 있을뿐더러 약자가 아닌 이들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않다. 무리지어 린치를 할 경우 일개인은 ’랜덤하게‘ 처벌받거나 잘못 이상으로 과도하게 처벌받는다는 점에서 공정하지 못한 처우를 받게 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영역에서 사회적 강자라 간주된 이들이 린치를 당하는 현상도 전형적인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페미니스트들은 이 현상조차도 여성혐오의 측면에서만,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XX녀' 밖에 없는 것처럼 묘사했다. 물론 ‘여성’이 피해자가 될 경우 사이버린치엔 ‘여성혐오’가 결합된다. 하지만 사이버린치는 ‘여성’만을 피해자로 삼는 것은 명백하게 아니다. 잠깐 짜증을 내보자면 남성은 결코 피해자가 될 수 없단 것이 그분들의 신념이 아닐까 우려될 지경이다). 그러므로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선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를 비판하고 규제를 긍정하되 그 최소한의 규제를 제외한 다른 사회적 압력에 대해선 과도한 것으로 인지하고 비판하는 세태가 절실히 요구된다. 자기 편을 방어할 때는 ‘표현의 자유’와 ‘노동권’을 끌어들이고 타인을 공격할 때는 ‘소비자행동’과 ‘윤리적 기준’으로 정당화해선 ‘불균형 시정의 불균형’을 벗어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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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래서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 본다면 다시 ‘어떻게, 누가 만들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규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권력’과 ‘합의’가 필요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옹호자들은 이중 ‘권력’만 본다. ‘합의’를 말하는 이들을 ‘씹선비’라고 비난한다. 물론 ‘권력’이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해 새누리당 권력이 교체되지 않는 이상 ‘증오범죄(hate crime)/혐오발언(hate speech) 입법’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이 교체된다 해도 ‘합의’가 없다면 논의는 지난해지고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권력’을 교체하기 전부터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여기서 ‘질적’인 문제를 ‘양적’으로 전환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예컨대 ‘운지’(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비하 관련 용어)를 규제한다고 말하면 저쪽은 ‘재규어’(고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비하 관련 용어)를 들고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떠드는 이 사회적 상식의 장에선 거의 ‘우리 편’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그것과 그것을 비교하냐?”라는 감정적인 규탄부터 먼저 나올 것이다. 물론 같지 않다. 그리 따지면 세상에 질적으로 같은 사안은 없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양적으로 전환시켜 치환할 수밖에 없다.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은 대체불가능한 경험이라 여기고, 그것에 대해 특별한 존중을 요구한다. 물론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의 장을 열려면 존중하면서도 양적으로 치환해야 한다. 민주당 지지층과 페미니즘 지지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얘기다.

권력만 교체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누리당 지지자들까지 끌어내서 합의를 해야 효력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새누리당에게 뭘 더 양보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이 합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국정원/검찰권력에 의한 공안통치-국정교과서로 인한 세뇌공작-‘일베’와 ‘어버이연합’을 별동대로 활용하는 시민사회 교란 모델”에 종속될 것이다. 이 모델을 교란하기 위해선 물론 여러 권력조직에 대한 개혁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심층적인 층위에선 새누리당 지지층이 합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압력이 규제의 합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한다. 누구들처럼 민주화 혐오를 처벌하자고 말한다면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죄는 어찌할 것인가? 둘 다 규제에 포함시킬 것인가? 아니면 둘 다 풀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준의 논의가 매우 구체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권력을 교체한다 한들 이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면

이선옥은 미디어오늘 기고에서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경험상 언론운동에 대해 발언할 때 빼고는 이 단어를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이 단어를 쓰면 당파성에서 자유로운 미끈한 공론장은 존재할 수 없다거나, 이미 인터넷에 훌륭한 공론장이 존재한다는 식의 냉소주의나 자뻑 논리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박한 의미에서 사용해도 다들 달려들어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체하려 드는 단어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논의의 흐름 속에서 여러분은 ‘규제’가 필요하고, ‘합의’가 필요하다면, 이를 만들어내는 그 공간이 ‘공론장’일 거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사회의 상식이 국가권력의 근간을 구성하는 수준으로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립충’이 되거나 ‘씹선비질’을 해서 적대자들을 돕고 우리 편의 힘을 빼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공론장은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외려 약자에게 도움이 된다. 현실세계의 발언권은 공론장이 지향하는 것보다 훨씬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약자편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는 강자들을 합의의 장으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합의는 여러 사람이 참여할수록 구속력이 커진다. 몇 사람이 내딛는 여러 걸음보다 여러 사람이 내딛는 몇 걸음이 실질적으로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자신의 ‘사회적 상식’을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지능이 없다’고 경멸하는 그 사람들이 각자의 지능을 활용해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다. 동원되는 담론의 어휘와 수사의 격렬함에 비해 논의가 빈곤한 이유에 대해, 나는 누구들처럼 ‘지능’의 문제라 말하기보단 차라리 ‘의지’의 문제라 말하고 싶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상식’이든, 진보담론의 ‘상식’이든 이러한 영역을 가꾸어야 할 필요성을 무시하고 살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죽자고 싸워대는 양측은 의외로 비슷한 토대에서 출발하여 적대자로 분화된 경우가 많다. 각자의 ‘하던 대로’를 그대로 놓아두고 신봉하면서 상대방을 악마화하려는 편협하고 안이한 욕망에 기대며, 그 결과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화력과시’ 밖에 없는데, 또 그 광경을 보면서 다시금 서로의 ‘소비자 갑질’을 비난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읽는 당신의 상대편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을 두들겨 패야 그들이 그런 걸 만들어줄 거라고 제발 말하지 말자. 한국 사회의 권력기관이 자기 정당화가 필요없는, 담론화가 필요없는 문맥에 살고 있음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그런데 그들이 얻어맞는다고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메갈’을 사회적으로 두들겨 패야 한다고 선동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다구리’는 다시금 편향을 만든다. 지금 내 주변에선 남자들이 주변 남자들의 메갈 다구리에 학을 떼서 ‘메갈을 이해할 지경이다’라고 말하며 단톡방을 나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진보담론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이전, 서로의 논의의 토대를 확인하고 발언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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