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중략)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이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166~167쪽)  

우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않았을까. 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간 신군부가 광주를 참혹하게 진압했던 사건 정도로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 잊혀진 사건, 아니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5·18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도 없는 한국 사회는 과연 세월호를 잊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80년 5월 15일을 정점으로 서울역 앞에 모인 학생 10만 명과 시민들은 대규모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는 크게 세 가지. “비상계엄령 해제”, “신군부 퇴진”, “유신 헌법 철폐” 이에 대한 신군부의 대응은 계엄령 전국 확대, 대학교 휴교령, 국회폐쇄였다. 군부가 다시 들어서는 데 대한 저항은 국민이 주인이고자 했던 몸부림이었기에 5·18은 광주만의 일일 수 없다. 하지만 5.18은 어느새 광주라는 지역에 갇혀 지금보다 좀 더 참혹했던 과거의 일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세월호도 광화문 광장 안에 갇힌 것은 아닌지 싶은 생각도 든다.     

15살 소년이 시위대에 가담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친구를 목격한 뒤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자원하게 되고 ‘미성년자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시민군의 요구를 무시한 채 끝까지 도청에 남게 된 이야기, 도청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막내아들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어머니와 곧 군인들이 오니 집으로 가 안전하게 있으라며 어머니를 막는 시민군의 모습 등 ‘소년이 온다’는 5·18의 참상을 옮겨 놨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작가 한강은 광주 출신이다. 그는 5·18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를 왜 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구경기에서 용기가 없는 사람은 계속 공을 피하기만 한다. 그러다 결국 혼자 남는다. 그러면 피하지 않고 공을 맞든 받든 맞서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5·18에 대한 글이 많다는 핑계로 광주에 살며 5·18을 피해왔지만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고통의 잔혹함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저항하던 시민들의 ‘깨끗함’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5·18 당시 광주도청에 남아있던 사람은 희생자가 아니다.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어”(171쪽) 그들은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곳에 남아 끝까지 싸운 것이다. 그 숭고했던 자들은 죽는 순간까지 이 사회의 주인이었던 자들이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중략)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거야.”(173쪽) 어쩌면 5·18마저 기억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민주주의를 꿈만 꾸던 우리가 신군부의 희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211쪽)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취재했던 과정도 소개했고 소설을 대하는 감정상태를 드러냈다. 

   
▲ 소년이 온다/ 한강 저/ 창비 펴냄
 

소설은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에필로그까지 7개의 장은 화자가 각각 다르다. 5·18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의 시선이 녹아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46쪽)로 2장이 시작된다. 군인이 죽인 한 소년의 영혼으로 화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깨닫게 되면서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제공한다. 

독자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질 때 쯤 한강 작가는 ‘기울임체’를 통해 가독성을 떨어뜨렸다. 소설가 김중혁은 이를 ‘과속방지턱’이라고 표현했다. 문장의 강약을 조절해 읽는 이의 감정까지 배려한 장치다. 죽을 줄 알고도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양심’이었다고 한다. 목숨보다 무거운 양심을 기억하기 위한 작가 한강의 노력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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