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20년 3월5일과 4월1일 창간됐다. 94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신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수도 없이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론지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시기로 있었지만 탄압이 거세지고 불법적 권력이 강해지면 표변해 권력의 편에 섰다.  

최근 발간된 <조선일보 대해부> <동아일보 대해부>는 부끄러운 94년간의 지면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이 신문들이 추종한 ‘일본제국주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키워드를 중심으로 책 내용을 정리했다. 

▶“그대는 적이 아니라” 일제 찬양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처음부터 일제를 추종한 건 아니었다. 한때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인 1920년 6월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등>이란 연속 기획물을 내면서 “왜놈”,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죽이려 한다”고 비판하며 7~8년간 민족지로 활약했다. 

이완용과 버금가는 친일파 송병준이 인수하고도 조선일보는 조선 총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설을 실었고, 일본 경찰이 조선인 28명을 학살한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일제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전조선기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항일단체 신간회 설립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1928년 무기정간 이후 논조가 서서히 바뀌었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친일 성향이 노골화됐다. 
 
동아일보의 민족지 역사는 5개월로 매우 짧다. 창간 15일 후 <평화에서 만세 소요>로 발매반포금지 처분을 받았고, 일본의 삼종신기(칼·거울·옥새) 숭배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 9월25일자 사설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동아일보의 친일논조는 1921년 속간부터 시작된다. 

   
▲ 조선일보 1936년 1월1일자 1면
 

이 신문들이 일왕을 ‘대원수 폐하’, ‘천황폐하’라고 호칭하며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싣고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용비어천가’를 쓰는 건 예사였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강제동원인 조선지원병제도를 옹호했고, “세계대전은 제국(일제)의 일대 비약의 호기라 할 것”이라며 전쟁마저 미화했다. 일본군과 관료를 향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도 “그의 배후에 조선공산당의 마수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고 왜곡했다. 급기야 윤봉길 의사를 ‘이봉길’로 오기하기로 했는데 <조선일보 대해부>에서는 이를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성을 헐뜯거나 독립을 부정한 사설 등으로 일본 지배를 앞장서서 옹호했다. 사설 <일본 친구여>에서는 “그대는 위의 적이뇨 아니라. 그대가 흉악한 사람이뇨 아니라”면서 “하나는 보기 좋은 푸른 산이요, 둘은 훌륭한 도로와 셋은 훌륭한 재판소요 훌륭한 행정관이요 다섯은 훌륭한 산업개발이요 여섯은 훌륭한 교육진흥이뇨”라고 일제를 찬양했다. 

1924년에는 파문을 낳은 사설 <민족적 경륜>을 5회에 걸쳐 게재했다. 이광수는 이 사설에서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며 독립을 부정했다. <동아일보 대해부>는 “한국 현대 언론사에서 악명 높은 반민족적 문필행위 가운데 아주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 파문을 낳은 동아일보의 <민족적경륜>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들을 매도하는 논조도 펼쳤다. <김구 등 각파 규합/반만항일을 개시?/중O호 조회를 조직하고 폭동반 조선에 잠입설>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했다. 

동아일보는 이길용 기자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들어 자신들이 민족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책 <인촌 김성수>에 따르면 이 사건을 알게 된 사주 김성수는 오히려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반응을 보였고, 송진우 사장도 이 기자를 크게 꾸짖었다. 이길용 기자 등 많은 사원들이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사태는 수습됐다.        

하지만 이렇게 ‘진충보국’하던 조선·동아도 결국 1940년 폐간됐다. 조선일보는 사고를 통해 “신문 통제의 국책에 의해”, 동아일보는 “총독부 당국의 신문지 통제 방침에 순응하여”라고 폐간 사유를 밝힐 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김구→이승만→4.19혁명 대열로  해방을 맞이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친일 행적에 대한 아무런 사죄 없이 속간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기사와 사설을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김구 선생을 “위대한 혁명 지사”라고 칭했고, 동아일보는 “임정은 건국의 공구”라고 했다. 

특히 동아일보와 김구는 반탁운동을 함께 주도했다. 분단 고착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돼 김구 선생의 실책으로 꼽히는 반탁운동은 동아일보의 왜곡보도에서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정체불명의 통신사 기사를 인용해 ‘소련은 1국 신탁통치를, 미국이 조선의 즉각 독립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동아일보 보도는 전형적인 왜곡보도다. 

하지만 김구 선생이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좌우 합작을 주장하자 조선·동아는 김구 선생에게 등을 돌린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방응모는 ‘김구 영웅화’에 앞장섰다. 그러나…그를 ‘이상론자’ ‘몽상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모험론자’로 몰아붙였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김구의 좌우 합작에 대해 “지성 상실에 당목 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김구가 “자기의 정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평양 남북회담에 참석했다고 비난했다. 동아일보는 그러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뒤 내각 구성에서 한민당과 당수 김성수(동아일보 사주)를 배제하자 이승만에게서도 등을 돌린다. 이는 동아일보가 1987년 민주화 전까지 ‘야당지’였던 계기가 된다.

   
▲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
 

이승만의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에도 침묵했던 조선일보는 대구 학생들의 2·28 데모를 계기로 3·15부정선거를 적극 비판했다. 마산 항쟁에서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정부는 아직도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등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사설을 잇달아 실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일보보다 한발 앞서 정권을 비판했다. 3월6일부터 14일까지 부정선거 실태를 고발하는 기사로 도배했다. 조선·동아는 이렇게 4·19 혁명 대열에 합류했다. 
     

   
▲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일왕 히로히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유신은 가장 적절한 조치”…저항기자는 대량해고  4·19 혁명을 지지했던 두 신문은 1961년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한다. 조선일보는 처음에는 ‘쿠데타’라고 했지만 18일에는 사설 <혁명에 바치는 찬사>를 싣는다. 동아일보는 쿠데타 당일부터 ‘반공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두 신문이 박정희 정권에 항상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다. 조선일보는 한일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자 “이 모든 기막힌 부조리가 모두 박 대통령의 책임 하에서 발생된 일”이라며 5·16 이후 처음으로 박정희를 비판한다. 

동아일보는 더 적극적이었다. 박정희와 2인자 김종필이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고 폭로한 국회의원 김준연이 구속당하자 “민주정치의 좌절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6·3계엄령 이후 시사만평 프로그램 <앵무새>의 제작진들이 연행되고, 공수단 장교들이 사옥을 습격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한다.   

언론통제를 위한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에도 많은 신문사 발행인들이 이 법에 찬성했지만 조선·동아·경향·대구매일은 끝내 반대했다.

하지만 1966년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조선·동아는 권력에 순응한다. 조선일보는 “조국의 앞날의 걸어가는 길을 내다볼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라고 환영했고, 동아일보는 “첫째는 그것이 두말 할 것도 없이 ‘평화’ 지향적이라는 점”이라며 “둘째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적’인 것이라는 점”이라고 찬양했다.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안으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터전이 확립되었고 밖으로는 긴장 완화와 남북교류 증대를 다짐하며 국정 전반에 걸친 유신적인 개혁이 예상”된다고 했다. 

   
▲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 사주측이 동원한 술 취한 폭도들에게 강제 축출되기 직전 편집국에서 마지막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는 기자들과 사원들.
 

이 시기 신문사 논조에 반발한 기자들의 언론수호 운동이 일어났다.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광고주들이 광고를 끊으며 광고가 90% 가량 줄어드는 광고탄압이 시작됐지만 이는 곧 시민들의 격려광고로 채워졌다.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 조선일보 기자들의 투쟁은 동료 기자가 2명이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면서 불이 붙었다. 

하지만 정권과 야합한 신문사 경영진들은 대량해고로 탄압했다. 조선일보 기자 16명이 파면당했고 37명이 무기정직 당했다. 동아일보 기자 17명이 해고당하자 동아일보 직원들은 제작거부 및 농성에 들어갔고, 동아방송 직원들 역시 이에 동조했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용역 깡패를 동원해 이들을 쫓아냈고, 113명은 현재까지 복직되지 못했다.  

▶ ‘인간 전두환’ ‘새 세대의 기수’ 낯뜨거운 보도  조선일보는 저항기자들을 대량해고한 후 군사정권을 그야말로 적극 찬양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은 이듬해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동원해 ‘화려한 휴가’란 이름 아래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조선일보는 저항하는 광주 시민을 “무장된 폭도”라고 했고,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사설에서는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왜곡했다.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자>에서는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며 계업엄군의 만행을 미화했다. 동아일보가 비상계엄이 확대된 19일 이후 사설을 싣지 않는 등 최소한의 저항을 한 것과 비교된다.

전두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키자 언론의 본격적인 ‘충성경쟁’이 시작됐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표기하라는 계엄사의 요구에 경향신문 등이 강력 반발하자 국보위는 336명의 해직 명단을 작성했고 실제 해직된 사람은 933명이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대상자 명단의 2배에 이르는 635명이 언론사 자체의 ‘끼워넣기’에 의해 해직된 것”이라고 전했다.

두 신문은 1980년 8월 최규하의 하야를 기점으로 ‘전두환 영웅 만들기’에 적극 뛰어든다. 조선일보의 압권은 23일자 지면이다. 전두환이 전역하자 1,2,3면을 털어 전두환을 띄웠다. 특히 3면에 실린 기사 <인간 전두환>에는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사에 앞서 공…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조선일보의 전체 지면이 등록돼 있는 ‘조선일보 아카이브’에는 이 3면이 삭제돼 있다.

   
▲ 조선일보도 아카이브에서 지워버린 1980년8월23일자 3면 기사 <인간 전두환>
 

동아일보도 뒤지지 않았다.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한다는 기사를 며칠에 걸쳐 게재했고, 전두환이 전역하자 사설에서 그를 “40대 이하 자주적 민주세대의 등장”이라고 평가했다.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애국 충정 30년…군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상>이란 기사를 실었다. 

두 신문은 전두환 정권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게 된 김영삼의 단식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다가 단식이 끝나자 보도했다. 전두환 정권의 말기 증상인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왜곡보도했다. 

전두환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는 달라졌다.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사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 시급하다”고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고문 경찰이 구속되자 동아일보는 1면과 2, 3, 5, 10, 1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직선제를 반대하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한 뒤 6월10일 항쟁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1면을 비롯한 총 7개 면을 항쟁 기사로 채웠다.  

조선일보는 끝까지 갈팡질팡 했다. 박종철 학생이 죽자 고문행위를 비판하면서도 “경찰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했고, 전두환의 호헌 조치에 대해서도 “파국은 우선 막아야겠다는 ‘정치적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6월 항쟁이 계속되자 “한 치만 더 나아가도 우리는 또 다시 저 무서운 추락을 피할 수 없다”면서 “야권과 학생들은 최대의 슬기와 절제 그리고 온유함의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당부한다”고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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