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가 때 아니게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불법·부정선거 감시운동에 들어갔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부정선거 감시라니. 시대착오라는 생각이 언뜻 떠오른다. 시민사회의 진정성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 후진국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부정선거가 핵심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지난 대선에서 자행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불법선거개입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명확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불법선거를 축소·은폐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야당도 입조차 벙긋하지 않고 있다. 외국의 주요언론들만 간간이 관심을 드러낼 뿐이다. 이런 판국에 시민사회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참여연대와 민변 등 120개 시민사회단체는 ‘국가기관 개입없는 공정한 지방선거 만들기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본격 운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출범 선언문에서 “국가기관들이 선거에 개입해 민주주의를 또한번 파괴하는 것을 차단하고 감시하는 것이 간절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번 지방선거는 국가기관들이 선거에 불법 개입한 2012년 대선 이후 치러지는 첫 전국 범위의 선거이다. 우리는 국가기관들이 선거에 불법 개입해 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우리는 국가기관들의 선거개입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선거 때마다 좋은 정책 제안과 시민의 투표참여 여건을 마련하는 데 노력해왔던 시민사회가 불법선거 감시운동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는 박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심판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야 할 것 없이 오로지 민생만을 내세운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로 심판론이 먹혀 들어갈 여지도 별로 없다. 야권의 지리멸렬도 한 몫 한다. 지방선거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정치인들도 많다. 그러나 여당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박근혜 정부의 독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다. “새누리당이 지방권력까지 장악하면 장기집권 내지 독재화로 접어드는 길이 열리는 거다.”(신경민 의원)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확실히 장기집권을 노릴 것이다.”(우원식 의원) “벌써부터 박 대통령 30년 집권설이 나온다. 선거승패에 따라 여권 독주가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양승조 의원)

여당 일각에서 제기돼온 ‘20년 집권론’은 허투루 들어 넘기기만은 어렵다.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우리가 20년은 더 해야 된다.” 지난해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의 말이다. 야당을 비난하기 위한 말이지만, 비수가 숨겨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박했다. “의식구조가 70년대 박정희 장기집권 시절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가 판을 치던 시절에 머물러 있음이 틀림없다.”

아무튼 여당은 일찍부터 ‘지방권력 심판’을 내걸고 지방선거에 올인하고 있다. 그만큼 이번 선거에 명운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 대통령도 선거를 앞두고 지역의 그린벨트 규제완화 등 선심성 정책을 내놓았다. 여기에 ‘무인기 소동’까지 겹쳤다. 이른바 ‘북풍 몰이’라는 의혹도 일고 있다. 보수언론과 장악된 공영방송도 연일 ‘박비어천가’를 읊어댄다. 자칫 ‘20년 집권론’이 현실이 될까 보아 두렵기조차 하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1967년 7대 총선을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삼았다. 여당인 공화당이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은 4년 임기에 중임만 가능했다. ‘3선 개헌’이 이뤄지지 않으면 영구집권의 꿈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가능한 모든 수법을 총동원했다. 공무원과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등 모든 공조직을 동원했다. 유권자들에게 고무신과 막걸리를 돌리며 공공연히 표를 사들였다. ‘고무신 선거’라는 말이 등장한 이유이다. 공개투표 대리투표 올빼미표 무더기표 환표 등 불법도 서슴없이 자행됐다. 중앙선관위가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아예 선거법 시행령을 뜯어 고쳤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 별정직 공무원들은 선거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박정희도 전국을 돌면서 도로와 교량 건설 등 지역개발을 약속하고 다녔다.

이를 통해 공화당은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이를 통해 1969년 3선 개헌이 가능해졌다. 1971년 7대 대선은 금권이 휩쓴 사상 유례없는 ‘부정타락 선거’였다. 박정희는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돈을 퍼부었다. 관권이 총동원돼 선거운동에 투입됐다. 지역감정을 본격적으로 조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공화당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경상도에 피바람이 분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야당 유권자를 투표인 명부에서 누락시키고 친여 유권자는 중복 등재시키는 조작도 일삼았다. 투표 당일에는 릴레이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불법이 난무했다. 개표과정에서는 야당 참관인이 쫓겨나기도 했다.

총체적인 불법·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간신히 김대중 후보를 따돌렸다.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도 나돌았다. 간담을 쓸어내린 박정희는 이른바 유신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꿔버렸다.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등장했다. 경쟁자였던 김대중은 감옥을 들락거리며 해외 망명지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박정희는 ‘체육관 선거’를 통한 종신대통령의 지위를 확보했다. 한국은 어둡고 암울한 유신독재시대로 접어들었다. 박정희의 부정선거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국민이 막지 못한 부정선거의 후폭풍은 거대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과거처럼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민주화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은밀한 신종수법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지난 대선에서 자행된 국정원 등의 불법선거개입이 이를 반증한다. 이 사건은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국가기관들의 선거개입 근절책도 나오지 않았다. ‘공정선거 네트워크’가 감시대상으로 꼽은 불법행위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가기관이 해서는 안 되는 불법행위 5가지가 그것이다.

우선,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가 정부 여당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종북’세력으로 모는 사이버 심리전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둘째 국가보훈처 안보교육, 안전행정부 민방위교육, 국방부 예비군훈련, 군 정훈교육 시간에 정부정책을 홍보하거나 정부여당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강연이나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셋째 국정원 등이 사회단체와 누리꾼을 부추겨 정부여당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글을 인터넷 등으로 퍼뜨리거나 집회를 개최하거나, 언론에 보도하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 넷째, 국정원과 검찰, 경찰이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건을 기획 수사하고,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유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정부가 후보와 정당의 공약을 평가하거나 특정정당과 후보에게 유·불리한 정책을 발표해서는 안 된다.

이들 단체는 지방선거일까지 금지행위 목록 널리 알리기,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시민감시 및 신고하기, 전국 시민사회단체들의 국가기관 선거개입 금지 요구서 청와대 보내기, 청와대 및 국정원 등에 시민경고 레드카드 보내기, 국가기관 선거개입 금지요구 시민행동의 날 등을 통한 운동을 펼쳐 나가기로 했다. 시민사회의 불법·부정선거 감시운동이 국민의 호응을 얻기를 기대한다. 더 이상 불법·부정선거가 우리 사회에 자리를 차지 않도록 하는 힘은 깨어있는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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