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박 대통령은 24일 열리는 이 회의 개막식 선도 연설을 할 예정인데, 정작 한국은 지난 2012년 한국이 주도했던 핵물질 방호협약 관련법인 원자력 방호법도 통과시키지 못해, 뒷맛은 매우 찝찝한 상태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22일 긴급 호소문을 통해 국회에 원자력 방호법 처리를 촉구했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정기·임시국회에서 왜 정부나 여당이 이 법안을 언급도 안했는지는 설명도 없었고, 이왕에 여는 임시국회, 야당이 주장하는 법안을 왜 받으려 시도조차 않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정홍원 총리가 긴급 호소문을 발표하자 KBS는 이 소식을 톱기사로 전했다. MBC도 두 번째 소식으로 전하며 주요하게 다뤘다. SBS도 2번째 소식으로 이를 보도했다. 대부분 지상파 방송사들은 정 총리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을 뿐, 대체로 야당의 입장은 담지 않았다.(관련기사 - ‘나라 망신’에 정부 탓은 없는 방송사들)

   
▲ 2014년 3월 23일 KBS 뉴스9 화면 갈무리.
 
KBS는 박 대통령의 핵안보회의 참석차 출국 소식을 전하며 “우리나라는 2년 전 서울 핵 안보 정상회의에서 핵 테러 억제와 핵물질 방호협약을 주도했고 핵물질 방호협약은 70여 개국이 협약 발효를 위한 법적 절차를 끝냈지만 정작 우리나라는 관련법인 원자력 방호방재법이 국회에 묶여있다”고 전했다.

이어 KBS는 “대통령 출국을 하루 앞둔 오늘 정홍원 국무총리는 여야가 정파를 떠나 이 법을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는 긴급 호소문을 발표했다”며 정 총리가 “국제사회의 신뢰와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이번 회의가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지 않게 정치권이 도와주시길 다시 한 번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한 사실을 전했다. 야당의 주장은 아예 없다.

MBC는 야당의 입장을 전하기는 했는데, “새누리당은 24일 오전 중이라도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면서 야권의 협조를 요청했고, 민주당은 야당을 압박하고 국민을 위협하는 정치공세라고 주장했다”고 언급한 수준이다. 정 총리의 호소문 발표는 자세히 전하면서 민주당이 왜 이를 ‘정치공세’로 치부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 2014년 3월 23일 MBC 뉴스데스크 화면 갈무리.
 
SBS는 비교적 자세하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기계적으로 분량을 맞췄을 뿐, 정홍원 총리의 주장을 대부분 전했다는 점은 다른 방송사들과 다를 바 없다. 지상파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결국 정부가 국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저렇게 야당에 호소하고 나서는데, 야당은 국익이고 뭐고 무시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방송사들이 관제방송 수준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 이날 지상파 방송사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핵안보 정상회의 후 독일을 국빈 방문할 예정이라는 사실도 전했다. 이 과정에서 각 방송사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난 독일 방문을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과 엮어 과도하게 부풀리는 보도를 하고 있다. 

KBS는 “박 대통령은 핵 안보 회의에 이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개발차관을 얻기 위해 찾았던 독일을 50년 만에 국빈자격으로 방문한다”고 전했고 MBC는 “박 대통령은 이어 독일을 국빈 방문한다”며 “지난 1964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을 찾아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고, 통일의 의지를 밝힌 뒤 50년 만”이라고 보도했다.

   
▲ 2014년 3월 23일 SBS 8시 뉴스 화면 갈무리.
 
SBS는 아예 박근혜 대통령 독일 방문 소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성을 쓰기도 했다. SBS는 8시 뉴스에서 “네덜란드에 이어 독일도 방문하는데 1964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 이후 50년 만에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이라며 “박 대통령은 통일 대박론에 이어 보다 구체적인 통일 구상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빈방문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50년 만일까? 그렇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2005년 독일을 국빈방문했다.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의 독일 방문 목적이 놀랍도록 흡사하거나 한 것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왜 독일을 국빈 방문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SBS도 ‘통일 구상’이라는 두루뭉술한 이유를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런데 방송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갖다 붙였다. ‘경제개발차관을 얻기 위해’라던지,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위로했다’는지, 치적을 잔뜩 부각시킨 채로. 이 뜬금없는 연결은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녀대통령임을 환기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기를 박근혜 대통령과 연결시키려는 포퓰리즘을 노린 보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 홍보팀에서 민망해 못할 만한 일을, 방송사들이 국민의 공공재인 전파를 이용해 알아서 해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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