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10월 유신’은 악몽이다. 1970년대 초반 대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유신의 악몽’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유신 독재체제의 암울했던 상황은 가슴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그만큼 유신독재체제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며 독재자 박정희에 대항해왔던 우리들에게는 젊은 날의 벅찬 가슴을 되살려 주기도 한다. 그러한 악몽이 최근 다시 부활하고 있다. 유신체제 선포 4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대선을 앞두고 ‘독재자의 딸’이자 ‘유신공주’인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르면서 유신의 망령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흡사 유신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의아심이 든다. 1987년 시민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이후 지하에 숨었던 좀비들이 지상으로 기어 나오고 있다. 박근혜 의원의 주술이 힘을 발휘한 것일까. 유신독재체제 하에서 써먹었던 ‘반공’ 주문은 ‘종북 좌파 사냥’으로 이름만 달리하여 맹위를 떨쳤다.

박근혜 의원은 이를 ‘국가관 검증’이라는 다른 주문으로 바꿔 불렀다. 보수신문들이 주도하던 색깔론에 박 의원의 이 발언이 더해지면서 ‘매카시 광풍’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박 의원의 한마디에 새누리당은 색깔론에 올인했다. 새누리당이 박근혜 사당화(私黨化)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유신의 망령은 박근혜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바꾸고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박근혜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새누리당 대표와 원내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까지 ‘친박근혜계’ 일색이다. 제왕적 총재 시절보다 더한 1인 지배 체제 정당으로 변모한 것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물론이려니와 의원들도 이제는 박근혜의원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유신선포 이후 공포정치로 국민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나 할까.

유신좀비 가운데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좀비가 전두환과 노태우 등 유신의 후예들이다. 전두환 좀비는 이등병 신분으로 육사 화랑대 연병장에서 육사 생도들을 사열했다. 또 호텔신라에서 억대의 호화판 손녀 결혼식을 올렸다. VIP대우를 받으며 골프를 즐긴 사실도 포착됐다. 전두환의 친구이자 2인자였던 노태우도 사돈인 신명수 전 동방그룹 회장이 자신이 맡긴 비자금 420여억원을 임의로 처분했다며 대검찰청에 수사요청서를 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유신의 후계자들이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육사 생도로서 쿠데타 지지시위를 이끌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키워 놓은 군대안의 친위대인 하나회의 수괴였다. 이들은 박정희가 측근의 총탄에 의해 사망한 직후 정권을 찬탈한 세력이다. 특히 전두환은 정권을 찬탈한 직후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중 6억원을 박근혜에게 주었고, 박근혜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대법원은 1997년 정권찬탈 과정을 반란과 내란으로 판결하고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이들이 버젓이 VIP대우를 받으며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박근혜의 주술과 무관치 않다. 선글라스를 끼고 ‘박정희 따라하기’를 즐겼던 이명박 대통령 집권초기만 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6.10시민항쟁이나 5.18광주민주화항쟁 기념식 때 극복해야 할 인물로 등장하고 가끔 경호원을 대동한 가족나들이가 신문지면을 장식했을 뿐이다.

이제는 ‘유신공주’의 집권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해 버젓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VIP로서 예우받으며 정정당당하게 국민 앞에 선 것이다. 전두환의 모교인 대구공고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행적을 미화하는 기념관까지 건립되는 판국이니 이들의 행각을 나무랄 일도 못되는 것 같다.

배후에서 박근혜 의원을 돕던 ‘좀비그룹’도 이제 버젓이 실체를 드러냈다. 이른바 ‘7인회’로 알려진 이 그룹은 유신독재 시절 청와대와 언론계 등에서 박 의원과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다. 김용환 최병렬 안병훈 김용갑 김기춘 현경대 강창희 등이 그들이다.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유신정권에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는 유신시절 조선일보 정치부장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안병훈 전 조선일보 발행인은 유신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이들 중 강창희 의원은 전두환 주도의 하나회 막내격으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 후보로 뽑힌 강의원은 박근혜 대선캠프 시절 좌장으로 통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보수색채가 뚜렷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권력과는 무관한 자문그룹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박근혜 의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원로그룹으로 대접받는다. 어쩌면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의 ‘수구꼴통’이라는 지적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6인회’처럼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주체로 나설지, 뒤에서 권력을 움직이는 실세가 될지, 국정운영을 자문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들’이 아닌 이들 ‘유신공주와 일곱 수꼴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할 것을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박근혜 의원은 유신시절 ‘영애’로 불리며 명실공히 2인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1974년 모친이 사망한 이후 20대초반부터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했다. 박 의원은 ‘유신잔당’이 아니라 ‘유신본당’이었던 셈이다. 유신 자체였으며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독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박근혜는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과 새마음봉사단 총재로 군림했다. 유신시대 청와대 안주인은 박근혜였던 셈이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의 지적대로 임명장을 주는 등 정치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유신통치의 장본인이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한다

유신시절 제2인자로서 살아온 박근혜 의원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생태적으로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근 새누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더라도 그렇다. ‘비박주자’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내 대선후보 경선룰을 고치지 않겠다는 지도부의 고집 속에는 박 의원의 의중이 숨어 있다.

박 의원이 비박주자들이 요구하는 완전국민경선제를 단연코 거부하는 것은 유신시절 몸에 익은 ‘체육관 선거’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철권통치의 독재자 박정희가 오버랩된다. 민주주의 질서를 숨 막히게 하는 ‘독재의 그림자’로 다가온다. ‘종북세력’ 못지 않게 '종박세력‘이 더욱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러한 박근혜 의원에게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서는 오로지 존경심만 하늘을 찌른다. 독재에 대한 반성과 유신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5.16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일 뿐이다.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투옥하여 고문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철권통치의 유신독재는 “역사에 평가를 맡겨야 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뿐이다.

유신피해자들에게는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참여정부 당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이 유신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발표에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불쾌감마저 표시했다. 인혁당과 민청학련 피해자들은 ‘본의 아니게 피해 입은 사람들’의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물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유신피해자들에게 박근혜 의원은 철면피로 보일 뿐이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는 실질적 종신독재체제인 10월유신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측근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군사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른바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령되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에는 공포가 넘쳐나 양성우 시인의 지적대로 ‘겨울공화국’이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되어서야 당시 이들을 옭아 넣었던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재심과 국가의 피해보상이 이뤄지고 있다. 군사법정의 사형판결 직후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관련인사들에 대한 재심 및 보상은 마무리됐고 민청학련 관련인사에 대한 재심과 피해보상은 진행중이다.

당시 유신을 겪은 인사들은 유신선포 4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유신독재체제의 악몽과 독재의 실상을 알리는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동안 피해보상을 받은 인사들로부터 모은 기금을 활용하여 관련인사들의 증언과 영상자료, 기록물 등을 활용하여 유신독재체재의 잔혹상을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신체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박근혜 의원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가혹한 철권통치를 일깨워주고, 독재에 항거해 싸웠던 아버지 세대의 활약상을 되새겨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느끼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의원의 주술에 걸려 유신독재체제로 회귀하려는 한국사회를 지키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유신의 악령인 좀비들이 다시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유신의 악령이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이들의 노력만으론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 70~80년대 독재시대에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희생했던 민주세력의 단합된 힘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거악에 맞서 대결하려면 민주화세력과 민주시민이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대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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