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가 벼랑에 선 운명이다. 한발만 삐끗하면 추락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인정하고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다하기는커녕 점점 더 위험천만한 벼랑 끝으로 다가서고 있다. 19대 총선에서 상실감을 경험한 야권 지지층은 참담한 심정으로 통합진보당의 ‘부정선거’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

총체적 부실·부정선거 사건이 터졌다. ‘총체적 부실·부정선거’라는 표현은 통합진보당이 직접 구성한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 조사단의 공식 조사보고서 ‘조사 결과 요약’에 담긴 내용이다. 총체적 부실·부정선거라고 자신들이 발표해놓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상식적인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합진보당 당권을 거머쥐고 있다는 ‘당권파’는 당 대표까지 포함된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는 지난 5일 우여곡절 끝에 당내 경선을 통해 선출된 비례대표 후보 14명에 대한 총사퇴를 권고했다.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인 비례대표 1~3번 가운데 1번 윤금순 당선자는 이미 사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당권파로 분류되는 비례 3번 김재연 당선자가 지난 6일 사퇴 거부 입장을 밝힌 데 이어 비례 2번 이석기 당선자마저 7일 오후 당 전국운영위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석기 당선자는 “저는 지도부의 공천이 아니라 당원들의 선택으로 비례대표에 출마한 사람이다. 당원의 뜻을 받들겠다. 당원의 결정에 따르겠다. 당원이 직접 선출한 후보의 사퇴는 전체 당원의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 당원총투표를 당 지도부에 요청 드린다”고 말했다.

당의 주요 결정 사항을 당원들에게 묻겠다는 주장은 자체로는 그럴듯하지만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우선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가 부정선거 의혹 사건에 대한 해법으로 당내 경선을 통해 선출된 비레대표 후보의 총사퇴를 권고했지만, 이석기 당선자가 이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또 오는 12일로 예정된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를 열기도 전에 ‘당원총투표’를 제안한 것은 중앙위 결정과 무관하게 사퇴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의 조기 매듭을 희망했던 당 안팎의 지지층 시선과는 거리가 있다.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권영길 통합진보당 의원은 7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통합진보당이 지금 걸어야 할 길은 딱 하나입니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고 살려고 하는 길이 죽는 길’입니다. 죽어야 삽니다”라고 말했다.

당권파 쪽 당선자들이 국회의원 자리를 내려놓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번 사태는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당원총투표 실시 여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통합진보당 당헌(2011년 12월 5일 개정)에 따르면 전국당원대회는 중앙위원회가 당에 관한 중요한 사항의 의결을 전국당원대회에 부의하면 공동대표단은 즉시 전국당원대회를 소집하도록 하고 있다.

결국 오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에서 전국당원대회 소집을 의결하면 열 수는 있는 셈이다. 문제는 열기 전에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는 점이다. 통합진보당 진상조사단은 이미 비례대표 선출 과정을 총체적 부실·부정선거로 규정한 바 있다.

당권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한 채 당원총투표를 할 것인지가 논란의 대상이다. 통합진보당 사정에 밝은 진보진영의 한 관계자는 “부정선거라는 것에 대해서 당권파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핵심인 것 같다”면서 “부정선거에 대해 눈을 감은 채 부실선거로 프레임을 전환하거나 당원총투표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당권파 쪽에서 이번 비례대표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는지를 순순히 인정할 것인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진상조사단의 조사보고서 중 일부 미흡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역공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이번 사태를 매듭지을지, 사태가 장기화 할 것인지는 당이 결정할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사태 장기화는 곧 여론 악화의 방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당권파의 당원총투표 제안이 받아들여지고 언론이나 여론의 보편적인 시각과는 달리 ‘당선자 사퇴 거부’로 뜻이 모아질 경우 통합진보당 전체가 여론에 버림을 받는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은 통합진보당 진상조사단의 발표를 통해 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총체적 부실·부정선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정작 당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야무야’ 정리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당권파 쪽에서 당원총투표를 제안하고 나선 것은 총투표를 통해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당을 더욱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비당권파 쪽인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는 7일 대표단회의에서 “투표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될 규칙, 가장 중요한 규칙인 직접선거, 그리고 비밀선거의 원칙이 훼손되었다는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유시민 대표는 “중앙위원회에서 의결해도 승복이 어려운 경우에는 또한 그 분들이(당권파쪽에서) 요구하는 당원 총투표를 할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면서도 “모든 문제의 핵심, 그 중심부에 있는 하나의 문제, 그것은 우리 당의 당원 명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총당원투표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당원명부가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인지 검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비당권파 쪽에서 당원총투표 카드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원 명부 정비를 둘러싼 문제가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고, 이는 이번 사태의 조기매듭과는 거리가 먼 상황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유시민 대표는 “당원 명부에 대한 신뢰성이 없을 때, 이 당원 명부가 확실하고, 당원 명부가 정상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믿음이 없을 때, 이 당원 명부를 토대로 한 어떤 당원 투표도 그 정치적 정통성,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한다”면서 “즉각적인 당원 명부에 대한 전면적 검증, 정비작업을 시작해야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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