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긴급] 지금 ARS 60대로 응답하면 전부 버려짐. 다른 나이대로 답변해야 함.”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쪽에서 야권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 과정에서 ‘선거 부정’을 유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정희 대표의 한 보좌관이 당원들에게 민주통합당과의 여론조사 경선 과정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전하면서 나이를 속여서 ARS 여론조사에 응답하라고 요구한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서울 관악을은 야권 여론조사 경선의 최대 격전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관악구청장을 두 번 지내고 관악구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한 김희철 민주통합당 의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맞대결을 펼치는 곳으로 경선 막판까지 당락의 향방을 알 수 없었던 곳이다.

이정희 대표는 여론조사 경선에서 김희철 의원을 꺾고 승리를 거두면서 통합진보당 쪽에 ‘희망가’를 안겨줬다. 심상정 노회찬 천호선 등 수도권 지역구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후보들이 모두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를 거뒀으며, 언론은 국회의석 20석 이상의 교섭단체 구성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 기사를 잇달아 내놓았다.

잔칫집 분위기였던 통합진보당은 최대 격전지인 서울 관악을에서 ‘선거부정’ 유도 사건이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꽁꽁 얼어붙었다. 김희철 민주통합당 의원이 경선에 불복해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자 비판을 쏟아냈는데, 통합진보당 그것도 당 대표 쪽에서 ‘선거 부정’ 사건에 연루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거는 게 아닌 컴퓨터 음성으로 여론조사가 진행되는 ARS 여론조사에서 응답자가 나이를 속이게 될 경우 ‘조사 결과’ 자체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대목이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20~30대, 특히 20대 표본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60대가 의도적으로 20대라고 응답하며 여론조사에 참여한다면 60대 여론이 20대 여론인 것처럼 여론조사 결과에 반영된다는 얘기다. 이는 여론조사의 취지를 뿌리부터 흔드는 잘못된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이어질 경우 여론조사는 믿을 수 없는 수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정희 대표 보좌관이 여론조사 나이를 속여서 응답하라는 내용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당원들에게 보낸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승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일지 모르나 진보정당의 버팀목과도 같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행위라는 점에서 사안은 간단치 않다.

이정희 대표 보좌관은 물론 이정희 대표, 나아가 통합진보당의 도덕성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조사가 진행됐다면 여론조사 경선에서 패한 상대방은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번 사건이 서울 관악을에서만 벌어졌는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 사례가 있었는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자를 보낸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책임 전가 논란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희 대표 쪽 핵심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자체조사를 했는데 문자를 보낸 것은 사실이다. (여론조사 경선 상황을) 중계를 해온 것은 사실인데 과도하게 과욕을 부려서 유도하는 듯한, 선거부정을 유도하는 듯한 문자메시지가 나갔다”고 말했다.

핵심 관계자는 “당원에게 보낸 메시지가 경선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캠프 관계자가 선거 부정적인 행위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이정희 대표도 도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순항하던 통합진보당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여론조사 경선 과정에서 '개입'이 스스럼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20일 오후 4시 30분 현재에도 통합진보당 메인 홈페이지에는 ‘야권단일후보 선출이 진행중입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외출시엔 착신전환’이라는 홍보 문구를 전하고 있다.

이정희 선거캠프도 19일 ‘휴대폰 문자’와 관련한 해명자료를 통해 “당시 선거캠프의 방침은 여론조사 전화를 받은 당원들로부터 파악된 여론조사 진행 상황을 다른 당원들에게 알려주고, 여론 조사 전화에 적극 응답하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통합진보당 쪽 후보들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론조사 경선’의 근본 취지를 흔드는 행위일 수 있다.

여론조사를 통해 경선을 한다는 것은 해당 지역구의 보편적인 여론을 살펴보고 어떤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적합한지 그 결과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겠다는 의미이다. 여론조사의 기본 중 기본은 표본의 대표성 확보이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 지지층이 더 적극적으로 여론조사에 참여하게 된다면 아니 이를 유도한다면 해당 여론조사 표본은 대표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론조사 경선을 할 때 집 전화 ‘착신 전환’ 등을 유도하는 장면이 이번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통합진보당은 물론 다른 정당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조사된 여론조사 경선 결과는 일반 여론조사 기관이 평소에 조사한 결과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와 관련 한백리서치 관계자는 “여론조사의 대전제는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임의적인 변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착신 전환’ 등으로 적극적인 여론조사 응답을 유도하는 것은 임의적인 변수를 넣는 것”이라며 “그렇게 될 경우 여론이 왜곡된다”고 우려했다.

한편, 이정희 대표는 20일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관악을 야권단일화 경선과 관련하여 선거캠프의 두 상근자가 당원들에게 여론조사 응답시 2-30대로 응답하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이 사실로 확인됐다. 후보자로서, 제 동료들이 불미스러운 일을 한 데 대해 이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깊이 사과드린다. 관련자 문책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희 대표는 "여론조사결과에 변동을 일으킬 정도의 행위라고 확언할 수 없으나, 민주통합당 후보로서 경선에 참여하신 김희철 의원께서 이 때문에 경선결과에 영향이 있었다고 판단하신다면, 재경선 하겠다"면서 "재경선의 방식과 시기와 절차 모두, 경선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희철 의원은 "이정희 후보의 재경선 제의를 거부하며, 이정희 후보가 공당의 대표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3월20일 오후 8시40분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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