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결국 '아바타' 총리로 퇴장
재임 10개월만에 사퇴 … 화려한 등극에서 퇴진까지
정치권 영입 0순위로 손꼽혔던 정운찬 국무총리의 '정치실험'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10개월만에 마무리됐다.
정운찬 국무총리는 29일 오후 3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무총리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사퇴의 변'을 밝히는 것으로 기자회견을 마무리했고, 별도의 질문은 받지 않은 채 기자들과 악수를 하며 퇴장했다.
정운찬 국무총리는 "주요 정치 일정이 일단락 되면서 대통령께서 집권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여건과 계기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면서 "따라서 지금이 국가의 책임 있는 공복으로서 사임의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충남 공주 출신, 서울대 총장, 경제전문가 등 정운찬 전 총리는 정치 상품성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여야가 그를 영입 0순위로 꼽고 영입경쟁을 벌인 것도 그의 정치적 상품성 때문이다.
2009년 9월3일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자 언론은 찬사를 보냈다. 한겨레는 9월4일자 사설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자로 발탁한 것부터가 자못 신선하다"면서 "비록 흡족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현 정권 출범 이후 가장 돋보이는 인사"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정책에 쓴소리를 하던 인물을 총리로 기용하면서 포용력 있는 정치 지도자의 이미지를 얻었다. 정운찬 전 총장의 총리 기용은 차기 대선 구도의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견제하고자 정운찬 카드를 꺼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정운찬 총리의 정치적 꿈은 클 수밖에 없었다. 총리도 지낸 인물이 정치적으로 꿈꿀 수 있는 다음 자리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정운찬 총리는 대선 출마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총리직을 잘 수행할 경우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급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정운찬 총리는 이회창 전 총리가 아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총리직을 수행하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대통령에게도 할말은 하는 대쪽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정운찬 총리는 'MB 예스맨'으로 전락했다. 정치적인 자기 색깔을 보여주지 못한 채 "731부대는 항일독립군" 발언 등 각종 입방아에 오르면서 이미지 추락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세종시 원안 폐기를 주도하다 결국 좌절된 사건은 정운찬 총리의 정치실험에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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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출신 총리 탄생에 기뻐했던 고향 사람들은 세종시 수정을 주도하는 정운찬 총리의 '강공 드라이브'에 강하게 반발했다. 정치적 기반도 없고, 지역적 기반도 없고, 실력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인의 '큰 꿈'은 이뤄지기 어렵다.
정운찬 총리가 물러난 이후 어떤 역할을 하게될 것인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분명한 점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 자리에서 그의 성적표는 신통치 않았다는 점이다.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은 "국론통합과 국민소통의 중심이 돼야 했을 정운찬 총리는 취임 이후 줄곧 국론분열의 중심에 섰다. 또한, 특정인맥에 의한 불법적인 국정농단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세종시 수정안에 매몰되어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총리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고 비판했다.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은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수정안 밀어붙이기 과정에서, 자신의 평소 소신과는 달리 4대강 사업의 옹호자를 자처했다"면서 "대통령이 보지 못하는 국민의 여론을 취합하여 국정운영의 변화와 혁신에 일조 해야 할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뜻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아바타 총리로서 재직하다가 물러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뉴라이트 성향의 '자유주의진보연합'은 논평에서 "비록 정 총리는 쓸쓸하게 퇴장하지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직을 걸고 용감하게 세종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세종시라는 '노무현의 대못'과 포퓰리즘, 지역주의에 감연히 항거했던 정운찬 총리의 용기에 거듭 찬사를 보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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