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끌려가 ‘코렁탕’ 먹던 시절과 얼마나 다른가
남산 끌려가 ‘코렁탕’ 먹던 시절과 얼마나 다른가
[뉴스분석] 보도지침 폭로 30년, 여전히 계속되는 청와대의 전화… 협조 요청했지만 강제 사항은 아니었다고?

“여기 남산인데요. 지금 무슨 통신으로 무슨무슨 기사 들어왔죠? 그거 내보내면 안 됩니다. 알았죠?”


남산은 중앙정보부를 말한다. 남산에서 전화를 받으면 편집부는 “무슨무슨 기사 hold”라고 적어놓곤 했다. 그게 이른바 ‘보도지침’이었다. 신아일보 정치부장 출신 김희진씨가 쓴 ‘유신체제와 언론통제’에 따르면 “신문사 편집국에 중앙정보부원이 상주하고 있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됐고 육군 보안사 요원이 자주 들르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걸 ‘라면 먹는다’고 했다. 조선일보의 한 기자는 미국의 한 신문이 CIA를 ‘Central Ill-informed Agency’라고 비꼰 걸 인용하면서 중앙무지부라고 번역했다는 이유로 밤새 라면을 먹어야 했다. 미국 CIA를 비아냥거리는 건 KCIA(중앙정보부를 의미)를 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라면을 먹는다’는 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코로 라면 국물을 먹기도 했다. 군복을 갈아입히고 욕설과 구타로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도 흔했다.

보도지침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주언 전 KBS 이사가 쓴 ‘한국의 언론 통제’에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언론 통제 사례가 다양하게 설명돼 있다

학생들의 ‘시위’는 ‘학원사태’라고 쓰게 했고 ‘물가 인상’ 대신 ‘상향 조정’으로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부천서 성 고문 사건은 “운동권 학생들이 성을 혁명 도구화한다”는 공안 당국의 발표 내용을 쓰게 했다. 미국의 민주화 압력은 철저하게 통제했고 군 관련 뉴스나 정부 고위층의 부패도 보도 관제 사항이었다.

보도지침은 ‘가’ ‘불가’ ‘절대 불가’ ‘과대선전 보도’ ‘용어 사용 불가’ ‘이행 안 하면 엄중 문책’ 등과 함께 어느 면에 몇 단 등 제목과 단수, 활자 크기, 사진 사용 등을 구체적으로 명기해 내려왔다.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도하지 말라” 1986년 7월27일.
“경상수지 계속 흑자라는 한국은행 발표는 1면 톱으로 다뤄라.” 1985년 10월21일.
“학생 시위를 ‘적군파식 수법’이라고 제목 붙일 것.” 1985년 11월28일.
“‘유인물 압수’ 보다는 ‘화염병과 총기 등 압수’로 뽑을 것.” 1986년 2월15일.
“검찰이 발표한 내용만 싣되 검찰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으며 검찰 발표 전문을 꼭 싣고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 보도는 불가” 1986년 7월17일.

▲ 보도지침의 일부. "김대중 회견 보도 불가"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 인용된 신홍범 전 조선일보 기자의 글 일부다.

“기자들이 고생해 가면서 쓴 기사가 부차장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거나 내용이 잘려나가고 위로 올라가면서 아예 묵살됐다. 그러고도 권력의 비위를 거스르는 기사가 나가면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해 조사하고 위협했으며 걸핏하면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해 공포에 떨게 했다. 권력은 이런 폭력의 공포가 가져오는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김주언 전 이사는 ‘한국의 언론 통제’에서 “언론이 미움과 적대와 분열을 위해 동원되고 이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언론에 지극히 불행한 일이며 동시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김성우 전 한국일보 편집국장의 에세이집 ‘돌아가는 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한국의 언론 통제’ 다시 인용.)

“1986년 6월9일 김씨의 단식이 중단됐을 때 정부 당국은 ‘제목은 2단’이라는 단서를 붙여 기사를 해금했다. 이 단서에서 탈출하려는 각 신문의 숨바꼭질을 보면 가련하도록 가상하다. 석간의 A 신문은 가판용 첫 판에서 주문대로 2단을 지켰는데 B 신문은 5단으로 껑충 위반했다. 당국의 불호령으로 배달판에서 B 신문은 3단으로 복귀한 대신 A 신문은 B 신문의 위반을 핑계대고 4단으로 솟았다. 조간은 첫 판인 지방판에서 C 신문이 석간의 B 신문을 견본 삼아 5단, 우리 신문은 석간 배달판의 단수를 평균하여 3단으로 정했다. 그러나 시내판에서는 C 신문도 우리도 모두 2단의 철책 속으로 수용되고 말았다. 탈옥은 실패했다.”

▲ "성 고문"을 "성 모욕"으로 순화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이채주 동아일보 전 편집국장이 쓴 ‘언론 통제와 신문의 저항’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정치현안’ ‘재야문제’로 표현돼 온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씨의 단식 관련 기사를 1면 2단으로 사진을 빼고 보도해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이 붙은 보도지침이 전달됐다. 크게 고민했다. 보도지침을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1면 톱 5단 크기의 기사로 보도했다. 기사가 나가자 편집국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압력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서울시대 일부 지역에 배달되는 2판부터는 2단으로 줄였다.”

보도지침을 위반할 경우에는 혹독한 보복이 뒤따랐다. 1985년 3월 김대중-김영삼의 만남을 3단 이하로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을 깨고 한국일보가 6단 크기로 보도했다. 청와대 홍보조정실장이 신문사를 찾아와 회장을 만나고 갔고 편집국장이 경질됐다. 중공 폭격기 불시착 사건의 엠바고를 깬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편집국장의 첫 일과는 아침에 출근해 그날의 지면 제작에 협조를 요청하는 이른바 보도지침을 전화로 통고받는 데서 시작된다. 이 기사는 1단으로 해라, 이 기사는 2단을 넘어설 수 없다, 이 사진은 못 싣는다는 것 등이다. 사건의 중요도에 맞춰 담당관 또는 홍조실장 선에서 선처를 요망한다. 조금 있으면 안기부 담당관이 확인차 전화를 하거나 찾아온다. 문공부 장관은 좀처럼 전화는 걸지 않는다. 큰 일이 있어 필요할 때만 신문사 편집국장과 방송사 보도국장을 한꺼번에 사무실로 부르는 것이다.”

이채주 동아일보 전 편집국장의 증언이다.

김주언 전 이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주요한 기사가 모든 신문에 사회면 1단으로 보도되던 때 언론인들은 비통함에 젖어 낮술을 마시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가판에는 크게 난 기사가 시내판에서 줄어들면 독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988년 언론 청문회에서 이광표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보도지침의 70% 가량이 지켜졌다고 한다.

1986년 9월9일 월간 말에 보도지침이 공개됐던 날 정부에서 내려온 보도지침은 “보도지침 공개 기자회견 보도 불가”였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전 이사는 당시 한국일보 9년차 편집부 소속의 기자였다. 그무렵 월간 말은 여러 발행인들이 돌아가면서 구류를 살았다. 안기부는 김태홍 월간 말 사장을 지명수배했고 김 사장의 진술에 따라 김주언 기자와 신홍범 기자 등을 곧바로 구속했다. 이들은 170여일의 옥고를 치른 끝에 1심에서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1995년에서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선고를 받긴 했지만 그동안 이들이 치러야 했던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의 언론 자유, 30년 전과 과연 다른가.

참담한 일이지만 이걸 먼 과거의 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이명박 정부 이후 8년, 숱하게 많은 기자와 PD들이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물리적인 폭력이냐 시스템적인 겁박과 불이익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보도지침 폭로 이후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녹취록이 터져나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전 수석이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4월21일과 30일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 비판을 자제해 달라고 압박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전 수석은 “하필이면 (대통령이) 오늘 KBS를 봤네, 한 번만 도와주시오”라며 “이런 식으로 지금 국가가 어렵고 온 나라가 어려운데 (KBS가) 지금 그렇게 해경하고 정부를 두들겨 패야 하는 게 맞느냐”고 반문하는 등 김 전 보도국장을 압박했다. 특히 “뉴스 편집에서 빼달라”, “다시 녹음해서 만들어 달라”고까지 요구하면서 직접적으로 편집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도 통제의 형식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다를 게 없다. 특히 이 경우는 세월호 참사 직후 온 국민의 관심이 희생자 구조와 책임 규명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약하다. 희생자들이 늘어난 책임이 청해진 해운에 있는지 해양경찰에 있는지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청와대든 어디든 그 비판의 당사자가 그 비판 자체를 없는 걸로 할 수는 없다. 설령 그게 협조 요청이든 친분 있는 사이의 읍소든 매우 적절치 않다.

이정현 : “고거 좀 한 번만 도와주시오. 국장님 나 요거 한 번만 도와주시오. 아주 아예 그냥 다른 걸로 대체를 좀 해 주던지 아니면 한다면은 말만 바꾸면 되니까 한 번만 더 녹음 좀 한 번만 더 해 주시오. 아이고.”
김시곤 : “그렇게는 안 되고 여기 조직이라는 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렇게는 안 되고 제가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요. 내가.”
이정현 : “그래 한번만 도와줘. 진짜 요거 하필이면 또 세상에 (대통령님이) KBS를 오늘 봤네. 아이~ 한번만 도와주시오. 자~ 국장님 나 한번만 도와줘. 진짜로.”
김시곤 : “하여간 어렵네 어려워.”
이정현 : “국장님 요거 한 번만 도와주시오. 국장님 요거 한번만 도와주고 만약 되게 되면 나한테 전화 한번 좀 해줘~ 응?” (2014년 4월 30일, 이정현-김시곤 녹취록 가운데)

문제는 이런 보도 통제가 일상적으로 전방위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녹취록은 극히 일부의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물 밑에서 작동하는 압력은 다층적이고 구조적이다. 이 전 수석은 방송법 위반 혐의로 이미 검찰에 고발된 상태인 데다 야당이 백종문 녹취록 등과 함께 방송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향후 추가로 언론 통제 정황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주목할 부분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반응이다.

이정현 전 수석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이라 통화가 조금 지나쳤다”며 “내 불찰이고 김 국장에게 굉장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당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구조작업을 전담하고 있던 해경이 선조치 후징계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뜻에서)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1일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정현 홍보수석이 뉴스를 보고 이야기했던 것은 홍보수석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협조(요청)를 했던 것 아닌가라고 추측한다”고 답했다.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민경욱 새누리당 의원도 “긴급한 상황에 놓이다보니 거친 표현이 오해를 살 순 있었지만 본연의 업무수행을 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이 전 수석을 옹호했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반응은 협조 요청이었을 뿐 지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30년 전에도 정확히 같은 논리로 보도지침 폭로에 대응했다.

“보도지침을 두고 정부 당국은 국가기밀 사항에 대해 언론이 신중을 기해 달라는 의미에서 요청한 것일 뿐 요청 내용을 언론사가 알아서 판단하는 참고사항에 불과하다고 했다. 언론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언론사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의 언론 통제’ 가운데)

정부의 보도지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문책을 받거나 경질되는 건 물론이고 남산에 끌려가 라면을 먹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남산에 불려가지도 않고 고문도 사라졌지만 정부의 협조 요청이 단순히 요청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일자리를 잃거나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김시곤 전 국장은 이 전 수석의 전화를 받은 지 열흘만에 사퇴 기자회견을 연다. 당초 세월호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김 전 국장의 발언이 논란이 됐지만 김 전 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서 사퇴를 압박했다”면서 “길환영 KBS 사장은 언론에 대한 어떤 가치관과 신념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왔다”고 폭로했다.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보도의 독립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에는 적반하장식 물귀신 작전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2년 만에 숨겨진 맥락이 드러난 것이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김시곤 국장을 해임하라는 우리의 요구가 청와대 입장에서는 아주 기쁘게 받아들여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KBS 보도국장 입장에서 청와대 수석의 전화는 단순히 협조 요청 이상의 무시할 수 없는 압박이 된다. KBS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보도국장을 사장이 임명한다. 윗 선에서 누군가의 말 한 마디면 하루 아침에 자리가 날아간다.

김 전 국장이 자신의 징계 무효 소송과 관련 법원에 낸 이른바 ‘김시곤 비망록’에 따르면 길환영 당시 사장이 “윤창중 속보를 첫 번째로 다루지 말라”고 지시한 직후 이 전 수석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대통령 방미 성과를 잘 다뤄달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 그 결과 톱 세 꼭지로 편성돼 있었던 윤창중 보도가 두 건으로 줄어 3~4번째로 밀려났고 사장과 보도본부장이 주문한 ‘정부, 북한에 대화 제의’ 관련 리포트 두 꼭지가 톱으로 올라갔다. (당시는 이정현 전 수석이 홍보수석이 아니라 정무수석을 맡고 있을 때였다. 김시곤 전 국장은 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본연의 업무 수행이었다는 청와대 해명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전 수석이 ‘청와대 안뜰서 아리랑 공연’ 리포트를 문제 삼아 “맨 마지막에 편집한 것은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김 전 국장은 비망록에서 “맨 뒤에 편집하는 것은 오히려 시청자 주목도가 높아서 홀대하는 게 아니다”라는 설명을 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김 전 국장은 이 전 수석을 ‘이 선배’라고 부르며 “이 선배, 솔직히 우리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 있습니까”, “저기 뉴스라인 쪽에 내가 한번 얘기를 해볼게요”, “제가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요”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실제로 보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방송의 독립성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 이번에도 KBS는 취재를 했지만 보도를 내보내지 않았다. 6월 30일 오후 전국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취재중인 뉴스타파, JTBC, KBS 영상카메라와 취재진(왼쪽부터).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30년 전과 다른 점이라면 편집국과 보도국에 기관원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기자들에게 보도지침이 내려오는 건 아니지만 낙하산 사장을 통해 보도에 영향을 미치고 청와대가 협조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직접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건 본질에서 다를 바 없다. MBC에서는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고 편집과 편성의 독립을 요구했던 기자와 PD들이 아직 현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조중동 등 일부 보수 성향 언론은 특혜에 가까운 종합편성채널을 불하 받아 편향적인 방송을 쏟아내며 여론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등 YTN 해직 언론인들은 해직 8년에 들어서고 있다. 숱한 검찰 수사와 징계, 해고 등으로 정권에 비판적인 프로그램들은 씨가 말랐고 예능 프로그램 조차 검열과 심의의 압박로 자기검열의 덫에 걸려 있다.

남산에 불려가 코렁탕을 먹던 그 시절에 비교해 과연 한국의 언론 자유는 얼마나 더 진전됐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19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돼 41년을 해직기자로 살아온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미디어오늘 기고에서 이정현 녹취록을 “신종 보도지침”이라고 규정한다. 김 이사장은 “박근혜 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언론 탄압이나 통제를 보면 언론자유 지수 70위도 과분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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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2016-07-05 11:04:26
왼쪽기자는 여자만 뚫어지게쳐보네 ㅋㅋㅋㅋㅋㅋ

독립군 2016-07-05 08:36:08
그때 중정에 있었던 새끼들 공개하면 안되겠냐?

링거병쉰 2016-07-04 16:44:28
최고급 대우로 해외여행 다니다 몸살이 왜 났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남산끌려가 옥살이
했다면

링거 1억병맞고도 링거투혼으론 한계라며, 그것은 뒈진다고 할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