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일산 덕이동을 찾았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다니는 도로 옆이었다. 인도 위 보도블록에서 비닐에 쌓인 여성의류를 파는 집이 보였다.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의류매장을 지나니 살림집이 나왔다. 좁은 공간에 세 칸으로 방도 나뉘어 있다. 뒤편에 작게나마 부엌도 있었다. 거기, 사람이 있다.

김명자씨는 어엿한 사업체를 가졌던 사장님이었다.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 이곳은 가구 단지가 분포되어 있었는데, 김명자씨의 가게도 그 안에 있었다. 실내 200평, 비교적 넓은 가게였다. 그 가구점에 김명자씨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발코니도, 가구 위의 장식도 그의 작품이었다.

2006년 옆집에서 옮겨 붙은 큰 화재가 가구점을 몽땅 태웠을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빚을 들여도 열심히 살아가면 갚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2008년 1월 땅 주인과 재계약을 맺었다. 사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땅 주인은 2008년 4월 세입자인 김명자씨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재개발업체에 본인의 땅을 팔았다.

김명자씨에게 돌아가는 돈은 없었다. 가구점 안에 수억원 상당의 물품이 있었지만 공탁금, 권리금도 없고 심지어 이주비도 주어지지 않았다. 재개발 업자는 이미 이주비를 땅 주인에게 주었노라고 했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주는 세입자가 하는데, 돈은 그곳에 살지도 않는 땅 주인이 가져갔다고?

그렇게 김명자씨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이혼하고 떠났고 그는 딸 셋과 가구점을 지켰다. 용역들이 몰려와 강제철거를 시작하자 큰 딸이 “가까이 오면 죽어버리겠다”며 강화유리를 손목에 갔다 댔다. 둘째는 철거하지 못하게 건물 옥상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용역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강제 철거를 시작했다. 큰 딸의 팔에서 피가 철철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 유리를 든 그녀의 손을 누른 것이다.

강제 철거 이후 천막생활이 시작되었다. 피땀 흘린 가구점은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라가 가만두지 않았다. 불법시설물이란 딱지가 붙고 벌금이 부여되었다. 강제철거도 있었다. 그렇게 천막이 부서졌다가 다시 쳐 지기를 반복했다. 벌금을 낼 수 없어 김명자씨는 69일 동안 감옥에도 다녀왔다. 지금도 그와 첫째 딸에게 65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어 있다.

그 사이 김명자씨와 딸들은 수차례 용역업체에 의해 구타당하고 모욕을 당했다. 천막이 철거당할 때 큰 딸은 용역업체에 의해 7시간이나 감금당했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용역업체는 이를 부정했다. 지난해 3월 4번째 천막이 철거될 때 이에 저항하다가 김명자씨의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욕은 예사였다. 참을 수 없는 인격적, 성적 모멸감도 주었다.

많이 울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도 많이 싸웠다. 아이들과 다 죽자고도 했다. 그때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5명의 철거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용산에서 죽었데, 많이 죽었데”, 믿을 수 없었다. 이후 이를 악물었다. 용산에서 싸우기로 했다. 용산에 지원을 갔다가 용역들에 의해 무릎이 파열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철거민이다. 덕이동의 마지막 철거민이다. 국가에 의해 ‘테러리스트 단체’로 지목된 전철연에 소속되어 있다. 생활조차 힘든 낡은 천막에서 그는 5년째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와 그의 가족에게도 어김없이 설은 돌아왔다.

“내가 막내딸이라. 아버지가 업고 다녔어요,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저희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에 국가를 사랑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제 몰골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으셔서 병원까지 입원하셨어요. 설날인데, 어느 날 부터 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하세요, ‘아가, 이미 본 것 같으니 오지 마라’고 하세요. 제가 이 모습으로 집에 가면 너무나 우울하고, 아이들도 기가 죽어있으니까”

그래도 2010년 보다는 상황이 낫다. 그때 그는 벌금을 못내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딸이 설 전에 면회를 왔다. 이에 김명자씨가 “우리 딸, 엄마가 떡국도 못 끓여줘서 어떻하지?”라고 물었다. 딸이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딸이 편지 하나를 주고 갔다. “엄마, 내일 모래가 설인데, 엄마는 여기 있고 나는 돌아가네요”, 김명자씨의 눈에서 피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이번 설은 예전보다 낫죠, 같이는 보낼 수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부터 아이들 생일도 기억이 없어요, 내 생일이 언제인지, 우리 친정아빠 생일이 언제인지도 몰라요. 용산에서 연대하다가 다치고 나서는 내 손으로 반찬 한 번 하지 못했어요. 인대가 너무 아파서, 아이들에게 그게 마음이 아프네요”

어느덧 천막에서 맞는 네 번째 설, 김명자씨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올해 추석도, 내년 설도 차디찬 바닥 위에서 보내야 한다. 빼앗긴 것을 되찾는 일은 이렇게 어려웠다. 자기 집을, 직장을 잃어버린 그녀는 강탈당한 것만 찾기를 원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나라에 버림받은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국민을 위한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어릴 때처럼 경찰아저씨가 다 해결해 주는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더 많이 가졌다고 적게 가진 사람 것을 빼앗으면 안되잖아요? 거대한 자본가의 만행은 우리를 서서히 말려죽이고 있어요 나는 사업자인데, 내 일터를 찾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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