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역동성이다.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것 같아도 때로는 소용돌이를 만나고 때로는 폭포를 만나면서 물길은 갈라지고 합치고 어우러진다. 2002년 대선, 2007년 대선 모두 드라마와 같은 흥미진진한 레이스가 이어졌다.

한국 유권자들은 국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인물,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만한 통큰 리더십을 지닌 인물에 끌리곤 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인물이 대통령선거의 주인공이 된다는 오랜 교훈도 이 때문이다.

2012년 대선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면서 밋밋한 선거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존 정치 질서와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안철수 현상’이 태풍을 몰고 오면서 2012 대선 지형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박근혜 대세론을 지켜본 이들은 “설마 지겠어”라는 심정에서 “정말로 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쪽으로 생각이 달라졌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CBS노컷뉴스
 
박근혜 대세론이 안철수 태풍 한 방에 무너진 셈이다. 여의도 정가 누구도 박근혜 전 대표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셈이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대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중요한 ‘사랑방 여론’이 형성되는 추석연휴를 앞두고 악재를 만난 셈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5년 전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선을 앞두고 ‘추석 악연’에 시달리는 모습이다. 2007년 대선을 한 해 앞둔 2006년 추석과 2012년 대선을 한 해 앞둔 2011년 추석 모두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 껄끄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됐다.

백영철 세계일보 정치전문기자는 9일자 4면 <또 쫓기는 박근혜 '추석 트라우마'?>라는 기사에서 “5년 전 2006년 추석 상에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올랐다. 추석이 10월 6일이었는데 이날을 기점으로 이 전 시장이 여론 지지율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확고하게 앞서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9월 9일자 4면.
 
백영철 기자는 “추석 뒤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로 벌어지면서 이후 박 전 대표는 한 번도 뒤집지 못했다. 올 추석 상에는 이명박 대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오른다”면서 “부모세대가 자식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동조하면 5년 전 상황이 되풀이되고 고착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도 10일자 3면 <박근혜 5년 전 '한가위 악몽'…이번 차례상 민심은>이라는 기사에서 "2007년 대선을 1년 3개월 앞둔 2006년 9월 추석 무렵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지지율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처음으로 앞섰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안철수 원장은 기존 야권 지지층 + 알파의 지지기반을 갖출 수 있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부산이라는 출신 지역도 그렇고 평소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는 평가 때문이다.

더욱 주목할 대목은 안철수라는 개인보다 안철수를 ‘정치 태풍’의 주인공으로 올린 그 바람의 정체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8일 KBS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안철수 현상, 올 게 왔다”면서 남 얘기처럼 주장했지만, 안철수 현상은 여권 핵심부의 선거공포를 더욱 자극하는 상황이다.

   
중앙일보 9월 10일자 3면.
 
이명박 정부에 등을 돌린 민심의 흐름이 2012년 선거 정국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박근혜 정당’으로 균형추가 기운 상황이다. 여기에 박근혜 전 대표의 고민이 있다.

핍박받는 정치지도자의 이미지는 많이 희석화 됐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진짜 실세, 미래권력의 상징 등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는 약자가 아닌 강자이다. 강자 이미지는 힘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임의 무게도 클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에 대한 영향력이 시간이 갈수록 확대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대선경쟁력에 대한 의문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표를 짓누르던 ‘표의 확장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과 장년층, T․K 지역 등으로는 대선 승리를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공통된 분석이다. 중도층의 마음을 얻어야 승리할 수 있는데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행보는 그들의 마음을 얻을 적극적이고 분명한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문화일보 9월 9일자 5면.
 
당장 10․26 재보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떤 정치 스탠스를 취할 것인지가 주목할 대목이다. ‘안철수 태풍’이 지나간 이후 한나라당의 선거공포는 한층 가열됐다. 누구를 후보로 내세울지를 놓고 진통에 진통, 자중지란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선거 때처럼 한 발 떨어진 모습으로, 선거결과 책임론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4․27 재보선 당시와 10․26 재보선에서의 박근혜 전 대표 위상은 큰 차이가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고민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부딪히지 않는 모습을 언제까지 보일지가 고민의 지점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여론의 냉랭한 정서를 고려한다면 ‘반이명박’ 깃발을 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문화일보는 9일자 5면 <위기의 박 '탈출구 찾아라'…'반MB 깃발 언제드나' 고심>이라는 기사에서 "문제는 현 정부와의 차별화는 자칫 지지기반인 보수층의 이탈로도 이어질 수 있고 대통령 임기동안 긴장감을 유지했던 이 대통령을 자극하는 것은 자칫 내부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표의 고민은 계속 길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 때리기에 나선 다고 민심의 흐름이 반드시 유리하게 흐를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박근혜 전 대표를 대선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본질적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치’가 감동을 이끌어내고 보수는 물론 중도와 진보성향 유권자의 마음까지 울리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 ‘신중 모드’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생각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 대한 철학이 무엇인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내일신문 9월 9일자 1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한나라당 천막당사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 등의 이미지만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 ‘감동의 정치’를 보여주기 어렵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역동적인 경선을 이어줄 후보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 K'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인 대선후보 선출 드라마를 이끌어내야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도 얻어낼 수 있다. 야권은 기존의 손학규 정동영 유시민 등의 후보군에 문재인 안철수 등이 참여하는 대선후보 선출 과정을 이끌어낼 경우 2002년 이상의 흥미진진한 대선후보 선출 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 지금의 ‘안철수 태풍’은 예고편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일신문은 9월 9일자 1면 <바보야, 문제는 감동이야>라는 기사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위기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유권자들은 '새로움'에 감동하고 '버림'에 감동하고, '높은 곳에 있는 줄 알았지만 나와 같다'는 데 감동하고, 자녀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환호한다. 그러나 박근혜 리더십에는 이런 요소들이 없다. 박근혜 지지층이 안정적이고 단단하기는 하지만 확장성에 한계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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