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려 총을 든 남성들, 이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전달한 여성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애>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생존자가 영화에서 제각기 5·18과 연관된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을 때, 역사의 화석으로 봉인된 '광주'는 다시금 심장을 박동하며 줄달음쳐 다가온다.

"5·18항쟁에 함께 했던 이름 없는, 가장 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시선을 담고 싶었습니다. 광주항쟁의 위대함, 영웅적 면모 이런 것보다는…. 사실 우리 이웃들, 평범한 그 분들이 항쟁에 적극적이었다고 해요."

지난 13일 저녁 서울 홍익대 인근 카페에서 만난 김태일 감독은 "1980년 광주항쟁 10일 동안 치안 부재, 치안 공백 상태였지만 범죄 하나 없었다"고 설명하면서 "도둑이나 부랑자도 항쟁에 함께 한 셈인데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항쟁에 참여했는지 그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고 촬영 동기를 말했다. 그러면서 "<오월애>는 그런 분들에게 헌사하는 영화"라고 밝혔다.

절차적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뤘다는 지금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느 순간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랑이 지속돼야 기억도 붙잡아둘 수 있기에 사랑 '애(愛)'를 붙여 제목을 지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광주항쟁 당시 넝마주이도 투쟁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 감독은 영화 한 단락을 애초 빈칸으로 비워둔 채 이들을 찾아 나섰지만 결국 바람을 이루진 못했다고 했다.

"광주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어서 넝마주이가 군데군데 모여 살았다고 해요. 광주 월산동이 대표적인데 그곳에서도 한 달 내내 계속 찾았거든요. 30∼40년 오래 사신 분들은 당시 상황을 전해주기도 했죠. 그 지역에 당시 14가구 정도 살았다고 하는데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진압한 다음날 총검을 든 군인들이 와서 헬리콥터로 모두 데려갔다고 하네요.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한 뒤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넝마주이를 가두고 했는데 어쩌면 거기 갔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금은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김 감독은 넝마주이 이야기를 영화에 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영화에는 대신 극히 평범한, 어쩌면 가장 위대한 수십 명의 '항쟁 동지'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기동타격대로, 누군가는 취사조로 시민군에 속해서 군부쿠데타에 맞섰던 역사의 주역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과일행상을 하거나 전파사, 꽃집, 중국집, 구두수선가게를 운영하며 생활전선에 선 인간다움과 그 건강성이 어떤 것인지 넉넉한 웃음으로 증명한다.

 

   
 
 

<오월애>는 항쟁 당시 주먹밥을 시민군에 조달했던 여성의 역할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 감독은 당시 항쟁이 '총'과 '밥'으로 일군 것이라고 예찬했다.

"투쟁은 총이나 칼만 갖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총과 밥, 두 개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워낙 격렬했던 역사라 시민군의 희생이 주로 강조되지만 당시 총과 밥은 같은 의미였다고 생각해요. 시민군은 폭도, 투쟁은 난동으로 규정된 상황에서 스스럼없이 주먹밥을 만들어 건네고 나중엔 시신을 염하는 일을 했던 여성들인데 이 분들은 남성과 다르게 죄책감을 아직 많이 갖고 있습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게 부끄럽다는 거죠. 그래서 얘기도 잘 꺼내려 하지 않았어요. 증언하는 데 익숙지 않은 분들이라 카메라 앞에 세우는 데 무척 애 먹었습니다."

친밀감을 무기로 현장에서 적극 사람들과 어울려 인터뷰를 끌어내는 덴 부인 주로미씨 공이 컸다. 주씨는 이번 영화의 조연출과 내레이터, 구성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주씨 뿐 아니라 이들 부부의 15살 아들 상구가 촬영보조역을 맡고 제작일지를 쓰는 등 <오월애>는 김 감독을 포함한 네 식구가 2년 동안 매달린 끝에 탄생한 노작이다.

 

   
 
 

한때의 시민군은 지금도 자장면을 배달하고 리어카에 참외를 싣고 시장에 내다 파는데 영화는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비추곤 한다. 역으로 가장 평범했던 이들이 31년 전 전남도청 사수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될 터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들의 공로를 너무 쉽게 잊었고 이들의 아픔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풀빛사에서 나온 두툼한 5·18 증언집과 임철우 소설 <봄날>을 많이 참고했다고 했지만, 기실 대다수 자료집이 1980년대 학생운동 혹은 명망가 중심의 투쟁만 담고 있어 밑바닥에서 항쟁한 이들의 기록을 찾는 게 몹시 힘들었다고 말했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그런 점에서 관객의 심중을 찌른다. 항쟁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이던 이영애 씨는 이제 중년의 과일행상 아줌마가 돼 5·18의 기억을 묻는 김 감독의 질문을 "쓰잘데기 없다"며 성난 얼굴로 딱 잘라 외면한다.

"거짓말 안 보태고 그때 어머님한테 30분 동안 길거리에서 욕 먹었어요. 카메라를 켜고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워낙 욕을 쏟아 붓다 보니 결국 카메라를 끌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게 광주 사람들의 일반적 반응이에요. 5·18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언론매체나 타지역에서 항쟁을 보는 시선 때문에 아픔이 여전한 거죠. 광주는 31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립된 섬 같은 느낌입니다."

 

   
 
 

김 감독은 언론의 잘못을 "형식적 취재로 광주 시민을 소외시켰다"고 지적했다. 또 난립한 5·18단체가 광주사회 갈등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때 되면 우르르 몰려가 진행되는 기념행사', '늘 같은 사람이 나와 앵무새 같이 반복하는 이야기', '작년과 올해가 다르지 않은 방송사 특집프로그램'을 하나씩 꼽았다.

김 감독은 "이제 5·18을 광주시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항쟁의 기억은 모두의 것이 돼야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전남도청 철거를 둘러싼 논란을 거론했다.

"도청별관을 둘러싼 싸움을 보면 가슴 아프죠. 5·18 단체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단체별로 갈등하고 있는데 항쟁 때 앞장섰던 분들이 도청을 철거하자는 쪽 선두에 있기도 해요. 그곳을 허물고 아시아문화전당을 세우면 5·18 정신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게 문화부 논리인데 실상 상권이 발전하길 기대하는 광주사람들 심리도 있습니다. 문제는 도청이 철거되면 5·18 정신이 서린 역사유적이 훼손된다는 것에 있죠. 광주사회가 그런 식으로 갈등을 겪고 있어요."

잔잔한 이 작품에서 유독 튀는 부분이 그 지점이다. 전남도청 철거를 둘러싼 논란 역시 광주의 현실이기 때문에 건너뛸 수 없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그래서 편집시간의 대부분을 쏟고도 만족스런 구성과 장면을 얻지 못했지만 "광주가 5·18과 관련해 반드시 좋은 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어 그대로 담았다고 설명했다.

 

   
 
 

2011년 '전남도청 사수'를 압도하는 논리는 경제가치다. 이런 목소리가 적잖게 먹히는 까닭은 광주가 워낙 형편이 좋지 않은 곳으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광주의 상처를 경제논리로 봉합하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 아픔은 여전히 잊기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민군에 합류했다가 지금은 평화반점을 운영하는 양인화 씨가 영화에서 부인 박복자 씨와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하다 "이건 다리 아플 때 먹는 약, 이건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이건 또…" 하면서 한 주먹 알약을 입 속에 털어놓을 때, 광주는 문득 현실의 상흔으로 다가온다.

김 감독은 5·18 유공자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53명이라며 유공자에 대한 정신적 위로, 경제적 보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입법화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하면 문제 일부나마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기대도 덧붙였다.

"5·18 유공자는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하는데 피해보상 형태로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노태우 정권 말기 여야가 특별법을 합의하면서 정치적으로 적당히 절충해버렸죠. 당시 정부는 '광주'라는 멍에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했거든요. 그렇게 서둘러 통과되다보니 보상도 일괄지급 형식으로 끝이 났죠. 5·18 유공자는 4·19 유공자와는 다릅니다. 4·19 유공자는 매달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는데 광주항쟁 유공자는 한번으로 모든 보상이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총 들고 싸우다 다치고 고문당해 몸 상하고 이런 상처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고 계속 약을 먹어야 견딜 수 있는 거잖아요. 더욱이 이런 분들은 몸이 불편하고 배움은 적고 또 폭도라 해서 오랫동안 감시 받았기 때문에 취직도 잘 안 됐고요. 생계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가정사에 곡절이 있는 사람도 많고 정상적 생활이 가능치 않았겠죠."

김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5·18 유공자는 학생운동가와 달리 정신적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고통은 가족 등 주변에 전이돼 집단의 아픔이 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제대로 위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은 광주를 형식적으로 훑고, 일부 단체는 갈등을 조장하며, 소수 명망가는 자신의 상흔을 전시하는 식으로 이들의 아픔에 생채기를 냈다. 최근 보수단체가 5·18항쟁을 북한의 소행처럼 왜곡한 일은 우리 사회가 광주를 바라보는 미성숙한 시각의 일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이 분들에게 아픈 기억은 잊고 싶어도 폭력적으로 엄습한다"며 "광주는 그렇게 정신적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채 흘러왔고 한국사회와 정부는 이들의 가슴앓이를 위로하고 배상하는 데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12일 개봉해 관객과 대면 중인 영화를 두고 감독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는 "단지 눈물 흘리고 보상하는 것 뿐 아니라 철저한 교육을 통해 진정한 반성을 해야 한다"며 "광주만큼은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실제 들여다보면 해결된 게 많지 않습니다. 학살자도 규명 안 됐고, 행불자나 사망자 수가 정확하게 나온 것도 아닙니다. 법적으로 명예가 회복됐다고 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지금도 미진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해결해야 할 것이 아직 많은데 벌써부터 잊는다는 건 우리가 권력자들 폭력에 너무 둔감해지는 것 아닐까요? 제2의 광주라고 했던 용산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아픈 기억이라도 계속 환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남북이 긴장 상황이라는 것을 핑계로 시민을 탄압한 역사를 다시 경험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가족과 함께 '민중의 세계사'란 연속작품을 기획하고 있는 김 감독에게 광주는 첫 이정표다. 그는 조만간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중동·아프리카·남미 등지를 돌면서 밑바닥의 증언을 통한 민중항쟁 역사와 그 후일담을 담아낼 생각이다. 김 감독은 "20년 동안 10부작을 낼 생각을 하고 있다"며 "가장 낮은 곳을 향해서 간다는 건 보석 찾으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어쩌면 난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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