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은 시집으로는 드물게 5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젊음이 사위는 것을, 그래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게 되는 나이를 서른으로 보았더랬다. 1994년에는 그랬다. 겨우 서른의 나이에 세상을 향해 나서기보다 ‘잔치는 끝났다’고 탄식하며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주춤하는 지식인 여성의 자의식이 너무 이르다고 본 것일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시인과 성은 다르되 같은 이름을 한 이영미 감독은 전주영화제 한국장편경쟁에서 선보인 <사물의 비밀>에서 시인의 회한을 받아 새로 답한다.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과거를 끊지도 못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쌓아올린 것을 허물지 못하는 까닭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여주인공 혜정(장서희)은 마흔이다. 혜정은 울먹이면서 말한다. “왜 마흔이야, 서른만 됐어도...”라고.
혜정이 울먹이는 까닭은 남들 앞에서만 애정 깊은 체하는 쇼윈도우 부부 생활의 삭막함 때문이 아니라 젊고, 아름답고, 상냥하고, 반듯하기 그지없는 스물한 살 청년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하필 그 청년 우상(정석원)은 제자고, 혼외정사를 경험한 여성들에 대한 혜정의 논문을 돕는 연구보조원이다. 그래서 ‘오르지 못할 나무’인데 자꾸 마음이 가고, 손길이 가고, 몸까지 따라가려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영화 <사물의 비밀>. | ||
그러나 혜정과 우상 서로에게는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각자의 ‘사물’들 만이다. 마치 최영미가 <마지막 섹스의 추억>에서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살아서 고프던 몸짓/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라고 읊조렸듯이 혜정은 속에서 들끓는 욕구불만을 인터넷 성인 사이트에 글을 쓰는 것으로 풀고 있다. 그런 혜정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연구실에서 항상 그녀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복사기뿐이다.
혜정이 결혼 생활이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양면적인 모습과 이름으로 살아가는 비밀이 있듯 우상에게도 비밀이 있다. 다복한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자라 몸도 마음도 완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우상은 사실 가정도 불우하고, 학생으로서의 낮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밤이 다르며, 혜정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순수하기만한 청년이 아니다. 그런 우상의 비밀을 낱낱이 담았다가 감쪽같이 지워주는 것은 늘 우상이 지니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뿐이다.
이영미 감독이 인격을 부여한 이런 사물들은 최영미 시인의
영화 <사물의 비밀>. | ||
최영미 시인이 ‘너의 젊은 이마에도/언젠가/노을이 꽃잎처럼 스러지겠지/그러면 그때 그대와 나/골목골목 굽이굽이/상처를 섞고 흔적을 비벼/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헤엄치고프다, 사랑하고프다’라고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에서 청춘에 대한 마음을 지레 포기하고 아쉬워만 한 것과 달리 이명미 감독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밀어붙이는 과정을 감독 자신의 사물,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내보인다.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민망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깝기도 한 비밀을 한번 들여다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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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아름답지만 사랑은 그보다 더 아름답다. 비밀은 아슬아슬하지만 사랑은 그보다 더 아슬아슬하다. <사물의 비밀>은 이 아름답고 아슬아슬한 스승과 제자, 연상의 여인과 나어린 청년의 관계를 통해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세상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으며, 접어야 하는 마음도 없고, 해서는 안되는 사랑도 없다고. 그러니 사물과 비밀을 나누는 대신 사람끼리 서로 마음을 열라고.
전주=이안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