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시절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고 말한 것이 주간 MBC 잡지에 실린 적이 있어요. 예전에도 저에게 다양한 모습이 있었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한 가지 색깔만 보여졌을 뿐이에요.”

<뉴스데스크> 앵커. 지난 2001년 입사 이후 맡은 프로그램 중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약한 기간이 가장 길었다. 박혜진(32·사진) MBC 아나운서를 만나기 전 머리엔 뉴스 진행자로서의 날카롭고 차가운 이미지부터 떠올랐다.

하지만 공백이 컸을 뿐, 박 아나운서는 지난 2004년 심야 라디오 방송 <박혜진의 모두가 사랑이에요>를 맡기도 했다. 당시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은 청춘 남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박혜진 아나운서가 지난달 31일 6년 만에 라디오로 컴백을 했다. 이번엔 낮 라디오 방송(월~토 오전 11시20분~12시)으로 신설된 <박혜진이 만난 사람>이다. 각계 인사들의 인터뷰를 전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생의 ‘휴먼 스토리’를 담는 것이 프로그램 취지다.

   
  ▲ MBC 라디오 '박혜진이 만난 사람'. ⓒMBC  
 
박 아나운서는 “개인적으로 제가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며 “그동안 워낙 인터뷰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요즘 방송 트렌드가 스피디하고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 다수인데, 이 프로그램은 호흡이 길고 여백도 많다”며 진솔하고 따뜻한 인터뷰를 얘기했다.

“힘을 빼자. 내가 편안해지자.”, “아나운서로서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현상만 쫓지 말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박 아나운서의 화두다. 최근엔 이 프로그램에서 이창동 감독·한맥 네트워크 류시문 회장을 만난 뒤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경계짓지 않고 편안함 사람으로 제 스스로가 자유로워지는 방송인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뉴스 앵커 이미지를 뛰어넘어 박 아나운서만의 또 다른 빛깔을 선보일 수 있을까.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MBC에서 박 아나운서를 만났다.

- 6년 만에 라디오로 컴백을 했습니다. 주위 반응은 어떻습니까.
"라디오는 늘 저한테 마법상자 같은 느낌을 주는 통로에요. TV는 스크린으로 차단되는 듯한 느낌인데 라디오는 좀 더 가까운 느낌이에요. 그동안 라디오와 인연을 다시 빨리 맺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좋은 기회가 이번에 왔어요. 그동안 제가 뉴스 진행을 많이 하다보니 목소리가 굵어지고 낮아져서 그런지 '너무 무겁다', '심야방송 같다'는 반응도 있었고, '차분함이 좋다', '시끄러운 대화가 아니라서 반갑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극과 극의 반응을 보여주시지만 저에게 많은 약이 될 것 같아요."

-제작진으로부터 러브콜이 오래 전부터 왔나요?
"오래 전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하하) 개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 사람의 히스토리가 궁금해서인데 그게 인터뷰의 핵심이잖아요. 그렇다보니 제안을 받았을 때도 흥미로웠고 인터뷰어로서 제가 아직 너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욕심을 부렸죠. 그래서 짠하고 '박혜진이 만난 사람' 프로그램이 나오게 된 겁니다."

   
   
 
- 며칠 해보니 과거 라디오 DJ를 했던 감이 오던가요?
"많이 달라요. 6년 전엔 20대였고 지금은 30대가 됐죠. 그때는 심야 음악방송이었고 지금은 낮 교양방송이에요. 예전에는 음악도 듣고 저의 휴식처처럼 편안할 수 있었어요. 지금 프로그램은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제가 마음을 다잡고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에요. 좀 더 책임감이 생겼다고 할까요. 처음엔 떨리더라고요."

- 심야 방송과 낮 방송의 차이가 큽니까?
"저는 차이를 두지 않았는데 주위에선 제 목소리가 밤에 어울린다고 하네요.(웃음) 제작 과정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뷰 프로그램이니까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큰 차이가 있죠." 

-지난 2주간 우지원 오은선 이창동 등이 출연했는데, 인물 선정과 인터뷰 진행은 어떻게 이뤄집니까.
"스텝들끼리 회의를 자주 하는데, 시의성이 있거나 이슈가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야기 주머니가 많이 담긴 사람이라면 게스트가 될 수 있어요. 한계를 두지 않고 다방면으로 찾고 있죠. 진행 방식은 다른 프로그램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방송 트렌드가 스피디하고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 다수인데, 이 프로그램은 호흡이 길고 여백도 많아요. 기존 방송에 익숙해져있는 청취자에게 인내심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인터뷰라는 것은 그 사람의 히스토리를 다루는 것인데 단편적으로 다룰 수는 없잖아요. 긴 호흡으로 갈 수밖에 없는거죠."

- 여백과 긴호흡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사람의 전체적인 풀스토리를 이해하려면 긴 호흡으로 그냥 들어주는 것도 좋은 인터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어가 의도한 질문과 대답을 얻어내는 것만이 인터뷰는 아닌 것 같아요."

- 구체적으로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되나요?
"될 수 있으면 출연자에게 질문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요. 인터뷰이를 당황하게 하려는 장치는 아니에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풀어내는 것이 중요한데 질문지를 정해주는 순간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구요. 인터뷰 질문이 그날 인터뷰를 경계짓고 한정지으니까요."

- 인터뷰 질문을 작성할 때도 여백을 고려하나요?
"자료 검색을 많이 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거기에 내가 함몰되더라구요.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를 그 자료로 한계를 짓는 거죠. 인간에 대한 호기심조차도 정보로 한계 짓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것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 내용적으로도 휴먼스토리처럼 어떻게 사람 향기를 담을지도 고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감히 어떤 사람의 인생 풀 스토리를 40분 안에 말할 수는 없어요. 제가 질문을 한 두가지하더라도 그 사람의 진심을 다 드러내게 하고 싶어요. 고민이 많네요. 진행을 하면서 깨지기도 하고 작은 기쁨도 누리면서 하고 있죠."

-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한 나름의 비법은 무엇인가요?
"힘을 빼야 돼요. 제가 힘을 빼야 인터뷰이도 진솔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고 있어요. 경직되면 프레임 안에 모든 걸 넣게 되는 것 같아요. ‘힘을 빼자. 내가 편안해지자’고 저에게 주문하고 있죠."

   
  ▲ 박혜진 아나운서 ⓒMBC  
 
- 2주 동안 해보시니까 잘 되는 것 같나요?
"저 스스로 엄격한 편이어서요, 아직 마음에 안 들어요. 앞으로 개선해야 될 점이 많이 보여서 칭찬 일색이나 ‘나 잘났다’는 식의 발언은 하지 않겠습니다."(웃음) 
 
- 출연자 중 가장 기억 남는 분은?
"이창동 감독과 한맥 네트워크 류시문 회장이 생각나네요. 요즘은 굉장히 개인주의적이고 물질 만능적인 시대잖아요. 그런데 이 두 분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또 가치 판단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성화된 생각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과의 인터뷰 속에 저의 시선이나 생각을 되돌아보게 되죠. 정말 말씀 한마디도 성실하게 하시는 면에서 말을 본업으로 하는 제가 반성할 부분이 많았어요."

- 각박한 세상이지만 주위도 돌아보고 사람들 마음도 열게 해주는 각성 효과 때문인가요?
"그렇죠. 그렇다고 제가 프로그램 통해서 일방적으로 교육을 강요하는 것은 원치는 않아요. 다만 함께 고민을 해보거나 이런 생각을 한 번 쯤 해보는 시간이었으면 해요. 이런 것들이 자기 자신을 오롯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본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에게도 그렇다면 타인에게도 성실하게 대할 수밖에 없을거에요."

- 그게 바로 인터뷰의 매력일까요? 
“뭔가 강요하지 않은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울림을 인터뷰어로서 잘 전달해 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인터뷰 매력이 있죠.”

- 올해로 MBC 입사한지 횟수로 10년째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거나 현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기간은 언제인가요?
"어느 순간도 기억에 남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박혜진에게 영향을 안 준 기간도 없죠. 프로그램이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줬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제가 얼마나 커왔느냐, 제 마음밭이 커왔느냐'는 문제인 거 같아요. 가장 최근이라 하면 뉴스할 때가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죠."

- 그동안 예능프로그램에는 자주 안나오신 것 같다.
"끼가 없어요. 그쪽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규모로 앉아있을 때 유머 코드가 있다고 하는데, 이게 방송용은 아닌가봐요. 그러다 보니 잘 안 나오게 되네요."

- 명절 때 되면 부담이 되는 것 아닌가요?
"부담이 되요. 어떻게 하면 안 걸릴까 하는 생각도 하죠. 다만 퍼포먼스로서 저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본질은 아니잖아요."

- 최근에는 아나운서가 드라마, 예능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어 '아나테이너'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방송 환경이 많이 바뀌기는 한 것 같습니다. 여자 아나운서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확실히 줄여든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나테이너도 소통의 한 방법이라면 괜찮다고 봐요. 다만 수위조절은 해야죠. 아나테이너가 아나운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또 다른 이름이라면 한번 생각을 해봐야할 필요가 있어요. 아나운서에게는 두 가지 잣대 늘 대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친근하고 편안하길 원하면서도 품위와 교양 등 그런 것들을 동시에 요구하죠. 예능의 영역에서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가기에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아나운서 개개인이 지향점을 반드시 생각해야 할 필요는 있는 거 같아요."

- 개인적인 목표는?
"저는 방송 호흡이 좀 길고 고민도 많고 그러다 보니 스피디한 것과 동시에 가기가 어려운 점이 있어요. 늘 한번 걸러 생각하니까 피곤한 스타일이죠(웃음). 무겁지 않게 가는 것, 좀 더 경계짓지 않고 편안한 사람으로 제 스스로가 자유로워지는 방송인이 되고 싶어요."

-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어릴 때는 타이틀이나 자리 직위 이런 거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나운서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꿈이 없어졌어요. 아나운서가 꿈이었으니까. 그 이후에 계속되는 고민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으로 무엇을 누릴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죠. ‘세상에 어떤 기여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가’라는 소명이죠. 또 고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현상만 쫓지 말라는 거죠. 뭐든지 습관화되고 관성화되는 순간 ‘앗’하고 느끼는 순간이 와야 해요."

- 최근 일복도 있고, 결혼복도 있다. 신혼은 어떠신지?
"좋네요. (웃음) 함께 한다는 게. 나만 알고 살았던 것 같은데 ‘우리, 함께라는 것이 좋은 거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껴요. 여러 부분에서 새록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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