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국내 모든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인실명확인 수단으로 의무 도입이 예정돼 있는 아이핀(I-PIN)이 국·내외에서 밀거래 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는 7일 이번 아이핀 부정발급 사태가 아이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며 제도보완 방침을 밝혔지만 향후 대규모 금융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무기명 기프트카드를 타인 명의로 등록, 아이핀 1만1280개를 부정 발급받은 뒤 게임사이트의 계정을 불법 생성해 중국에 팔아넘기거나 1850명의 개인정보를 도용한 뒤 정보확인기관으로부터 아이핀을 발급받아 판매한 6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이들은 타인명의 신용카드 발급, 휴대폰 대리인증 등 본인인증 절차의 허점을 이용해 타인명의의 아이핀을 발급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아이핀은 주민번호를 입력한 뒤 휴대전화, 신용카드 등으로 신원확인을 거친 뒤 정부가 인증한 신용평가기관을 통해 발급되는데, 이들은 지난해 9월까지 가능했던 대리인 인증과 현재에도 통용되는 타인 명의의 대포폰, 무기명 기프트카드를 이용해 대량의 아이핀을 발급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아이핀 제도는 인터넷서비스 가입시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하도록 하면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지난 2006년 도입한 일종의 가상 주민등록번호 제도다. 주민등록번호는 다수의 개별 민간업체에 수집되지만 아이핀은 서울신용평가정보, 한국신용정보, 한국신용평가정보, 한국정보인증, 한국전자인증 등 기관을 통해서만 발급이 가능하다. 개인이 발급받은 아이핀은 주민등록번호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와 법조계 등에서는 아이핀이 개인정보 유출을 막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유출과 악용 문제는 근본적으로 민간기업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아이핀 제도는 정부가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도와주는 제도라는 것이다.

또, 방대한 주민등록번호가 정부가 지정한 5개의 기관에 집중되기 때문에 이들 기관에서 정보가 탈취되거나 유출될 경우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번 아이핀 대량 부정발급·매매 사태는 아이핀 제도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며, 수사기관이 범죄자들을 검거하기 전까지 방통위 등 관계기관에서는 아이핀 부정발급·이용실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아이핀은 신원확인을 바탕으로 발급되는 것으로 모든 인터넷 사이트 가입 등 곧바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핀 제도가 금융기관까지 적용될 경우 통장계좌번호는 물론 신용카드 거래 등이 가능해 걷잡을 수 없는 금융 사고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방통위는 7일 "기본적으로 아이핀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해당 카드사가 본인 확인절차를 명확히 수행하지 않고 카드 명의자를 변경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방통위는 또, 일단 부정발급된 것으로 파악된 4700여 개의 아이핀은 사용중지 조치하고 향후에는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금융위 등과 협의해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이 역시 아이핀 부정발급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어 이번과 같은 사태의 재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방통위 스스로도 대포폰 인증에 의한 아이핀 명의도용의 경우 아이핀 발급과정에서 명의도용 문제를 확인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아이핀 도용 확인절차를 인터넷에 구현해 부정 발급된 아이핀을 신고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인터넷 사용능력이 있고 아이핀 도용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개인의 자발적 신고에 기댄 대책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정부의 개인정보 보호정책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상의 번호로 바꿔주는 아이핀 전면확대가 아니라 민간 인터넷기업의 과도한 개인정보 요구 자체를 제한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보네트워크의 장여경 활동가는 "아이핀 제도로는 근본적으로 개인정보 유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그 위험이 현실로 나타난 사례"라며 "아이핀을 폐지하고 불필요한 개인정보 수집을 금지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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