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문근영씨가 5년여 동안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익명으로 8억5000여만원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진 뒤 오히려 "언론플레이" "잘난척 한다" "할아버지(고 류낙진 옹)가 빨치산 출신"이라는 악플(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등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KBS의 보도태도가 적절한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KBS는 지난달 초 탤런트 최진실씨가 사망했을 때 악성 댓글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악플에 문제점에 대한 리포트를 20일 동안 무려 11차례나 했고, 선플달기 운동 캠페인까지 소개했었다. 그러나 한 달 뒤 발생한 문씨 관련 악플에 대해선 타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 등이 이미 대부분 기사화한 이후에야 뒤늦게 악플소식을 전했다.

   
  ▲ 국민일보 11월13일자 1면. 문근영씨의 익명 기부소식을 첫 보도했다.  
 
KBS, 익명 기부 탤런트 문근영 '외조부 빨치산' 악플 어떻게 보도했나

문씨의 익명 기부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국민일보의 지난 13일자 1면 <2003년부터 매년 1억여원 공동모금회 기부/익명의 천사는 문근영>을 통해서였다. 이 보도가 나간 뒤 프런티어타임스 등 일부 인터넷매체와 YTN 동아일보 등 매체가 앞다퉈 기사화했다. KBS도 지상파 방송사로는 가장 먼저 이날 <뉴스9>에서 '얼굴 없는 기부 천사는 문근영'라는 리포트로 이 소식을 전했다. 이어 MBC는 14일 <뉴스데스크>에서 '연예인 기부 천사 맹활약'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14일 이후부터 인터넷엔 "잘난 척 한다" "의도된 언론플레이 아니냐"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보수적 군사평론가 지만원씨는 1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통해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 슬하에서 자랐다" "북한의 공작과 문근영 케이스" "문씨의 가족사와 그의 기부 행적이 빨치산의 심리전"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따라 조선 동아일보 등 일부 신문은 이 소식을 전했고, 방송사는 적극적으로 지씨를 비롯한 악플러에 대해 비판했다.

가장 먼저 나선 곳은 SBS. SBS는 지난 17일 <8뉴스> '"문근영 기부는 빨치산 선전용"…선행에도 악플'(11번째 리포트)에서 "칭찬도 모자랄 판에 고질적인 악성댓글이 다시 달리고 있다"며 "게다가 때아닌 색깔론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고 지적했다.

   
  ▲ 지난 17일 방영된 SBS <8뉴스>  
 
SBS "네티즌 공분…집단 소송이라도" MBC "악플러가 측은해" 맹비난

SBS는 당시 '클로징 멘트'에서도 "배우 문근영씨의 선행에 또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여러분도 아마 함께 분노하셨을 것 같다"며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격을 떨어뜨리고, 치욕감을 느끼게 만드는 이런 행태에 대해서 우리 국민 모두가 집단 소송에라도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날 밤 9시 방송된 MBC도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에서 "거액을 기부해 온 탤런트 문근영씨에게 악플이 달렸다. 이 악플은 문 씨의 기부와 상관없는 고향과 외조부 내력까지 들춰내고 있다"며 "이래가지고는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악플러가 측은해 보인다"고 비판했다.

   
  ▲ 지난 17일 방영된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  
 
그러나 방송사 중 문씨의 선행을 가장 먼저 보도했던 KBS는 이날 내내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18일에야 KBS는 <뉴스9>의 14번째 리포트 '기부천사 배우 문근영, 악성 댓글 논란'에서 이 소식을 전했다.

KBS는 리포트에서 "일부 논객과 네티즌이 문씨의 가족사를 거론하며 색깔론을 제기하고 악성 댓글을 달아 논란이 되고 있다"며 지만원씨의 글과 악성 댓글 내용을 소개했다.

KBS는 "6년 동안 남몰래 선행을 한 문 씨를 두고 도를 넘어선 색깔 논쟁과 무차별적인 악성 댓글을 보는 시선이 따갑다"며 시민과의 인터뷰를 통해 "좋은 의도로 행동한 것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가지고 헐뜯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하루 지나 보도한 KBS "도를 넘어선 색깔론·무차별 보는 시선 따가워…자정해야"

그러나 KBS는 김효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차장의 말을 통해서는 "(문씨의 기부가) 우리나라 기부 문화를 활성화하자는 측면이 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논란이 돼 고액 기부가 위축되지 않을까"라고 지적해 악플의 문제를 '기부 활성화 위축'의 문제로 흐렸다. 누가 보더라도 문씨 악플 사건의 본질은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사람의 집안 내력까지 들춰 망국적인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려는 행태에 있다. KBS 리포트를 눈여겨 봐도 그저 "시선이 따갑다" "자정하자" 수준의 지적이 전부다. 한마디로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리포트한 게 아닌가 하는 인상까지 준다.

   
  ▲ 지난 18일 방영된 KBS <뉴스9>  
 
무엇보다 KBS는 지난달 인터넷과 연예계, 정치권까지 뜨겁게 달궜던 최진실 사망 정국에서는 최씨 사망의 주범(?)인 '악성 댓글'과 '괴소문 유포자' 색출과 비판에 가장 열을 올렸다.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등 여당에서 발빠르게 사이버모욕죄, 이른바 최진실법을 마련하는 등 정치권으로 사태가 확산되자 여러차례 리포트하는가 하면, 최씨 사망을 계기로 선플달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류의 캠페인성 기사를 두차례나 내보내기도 했다.

최씨 사망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즈음은 지난달 22일엔 <뉴스9> '포털 사이트, 악플 줄이기 나섰다!'라는 리포트를 통해 "최진실씨 사건을 계기로 포털업계가 악성댓글, 악플을 막기 위한 노력에 본격 나서고 있다"며 "악플 피해 신고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선한댓글 달기 운동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스 외에 시사고발 프로그램인 <추적60분>도 지난 5일 '악플에 빠진 아이들' 편에서 악플 피해사례의 심각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 지난 5일 방영된 KBS <추적60분> '악플에 빠진 아이들' 편  
 
최진실 사망 땐 "사람잡는 댓글…수사 박차…파멸…선플운동해야" 열올리더니

당시 KBS 등이 최씨 사망원인으로 지목한 악플과 관련된 <뉴스9> 보도 주요 목록이다.

10월3일 '고 최진실 “사채업자 악성 소문에 죽고싶다”'
10월3일 '경찰, ‘사채설’ 괴담 출처 수사 확대'
10월3일 '사람 잡는 악성 댓글·괴소문'
10월4일 'NYT “한국 인터넷 발달이 최진실 죽였다”'
10월5일 '고 최진실 추모 발길 이어져…괴소문 수사 박차'
10월5일 '경찰, 한 달간 악성 댓글 집중 단속'
10월6일 '최진실 삼우제…‘괴담 유포’ 4명 조사'
10월6일 '‘사이버 모욕죄’ 도입 추진 논란'
10월7일 '‘악플’도 중독?…파멸의 부메랑'
10월8일 '악플 그만! ‘선플’ 달기 운동 확산'
10월22일 '포털 사이트, ‘악플 줄이기’ 나섰다!'

   
  ▲ 지난달 3일 방영된 KBS <뉴스9>  
 
최씨 사망 때와 비교한다면, 적어도 당시 KBS가 악플이 한 인간을 심리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데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문씨가 남몰래 기부한 사실이 알려진 뒤 되레 자신이 호남출신이며 외조부가 빨치산일 뿐 아니라 기부행위가 빨치산의 선전도구라는 그릇된 주장에 시달리고 있을 때 어느 언론보다도 먼저 적극적으로 이런 사이버 테러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했어야 옳다. 그저 "시선이 따갑다" "자정하자" 수준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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