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에서 "코끼리와 경쟁하려면 코끼리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한 바 있다. 상대방의 주장에 반론을 펼치려면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상대방의 프레임에 휘말려 들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언론에 나와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그런데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록 유권자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믿게 됐다. 사기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닉슨은 사기꾼이 돼 버렸고 결국 사임해야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책 기조였던 세금 감면 이슈를 끌어와서 서민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의제를 선점했다. "공화당=세금 감면, 민주당=세금 확대"라는 프레임을 깨뜨린 덕분에 오바마는 성공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과 이른바 조중동 등 보수 성향 언론과 경제지들이 주도했던 세금 폭탄 논쟁도 '코끼리'였다. 종합부동산세가 세금 폭탄이 아니라고 말할수록 세금 폭탄을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사회적 의제로 굳어지게 된다. 그 결과 종부세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세금 폭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13일 헌법재판소의 종부세 위헌 결정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헌재는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 과세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또 주거 목적의 1주택 보유자로서 일정기간 이상 주택을 보유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로서 종부세는 제도는 남되 실효성은 없는, 사실상 용도 폐기 상태가 됐다.

14일 언론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에 "헌재는 결국 강부자 편이었다"는 다분히 선정적인 제목을 내걸었다. 조선일보가 "종부세 세대별 합산 부과 위헌"이라고 차분한 제목을 내건 것과 대조된다.

   
  ▲ 조선일보 11월14일 1면.  
 
   
  ▲ 한겨레 11월14일 1면.  
 
대부분 신문이 세대별 과세를 인별 과세로 바꾸게 되면 부동산을 부부 공동 명의로 전환할 경우 종부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종부세가 껍데기만 남게 됐다는 상황 판단도 비슷하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느냐 부정하느냐를 놓고 견해가 첨예하게 엇갈린다.

흥미로운 대목은 보수 성향의 언론들이 내친 김에 종부세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일보는 사설에서 "이러한 결정에는 부동산 가격 상승과 조세회피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종부세가 조세 원칙과 납세자 부담 능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면서 "노무현 정부가 특정 지역을 겨냥해 징벌적 세금을 만들었다는 여론 반발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도 사설에서 "노무현 정권의 입법이 마구잡이였음을 재확인해준다"면서 "민주당도 종부세법의 신속한 전면 손질에 협력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매일경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리한 법제정에 대해 위헌 판정이 나고 부동산 시장도 극도의 침체로 떨어진만큼 뒤틀린 법체계를 송두리째 바로 잡는 게 순리"라며 "차제에 종부세와 재산세를 합쳐 재산세로 일원화하는 게 옳다고 본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종부세는 위헌 여부와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조세 상식을 벗어난 잘못된 세금"이라면서 "장기적으론 종부세는 폐지하고 재산세로 통합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엉뚱하게도 "IMF(국제통화기금)는 한국 정부에 대해 '재산세는 단일 세율로 걷는 게 바람직하다고'까지 충고했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의 사설 제목은 아예 "종부세는 시급히 폐지돼야 한다"다. 이 신문은 "명분을 상실하고 실효성마저 사라진 종부세를 존치시킨다면 가뜩이나 복잡한 과세 체계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상위 2%를 핍박하면서 나머지 98%의 지지를 노리는 정치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면서 "눈앞의 반사이익이 아무리 탐난다 해도 정치권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다운 생활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논조는 다른 신문들과 차별화된다. 종부세를 옹호해 왔던 이들 신문의 상황 판단은 어딘가 궁색하기 짝이 없다.

   
  ▲ 경향신문 11월14일 사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종부세는 알맹이가 빠진 채 빈 껍데기만 남게 됐다"면서 "부동산 보유세 강화라는 종부세의 애초 도입 취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 정책이라던 종부세는 재판관 대다수가 종부세 납세 대상자인 헌재에 의해 사실상 그 명을 다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 한겨레 11월14일 사설.  
 
한겨레는 "강부자 손 들어준 헌재의 종부세 무력화 결정"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종부세 폐지가 부동산 가격 폭등을 불러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신문은 "헌법상의 가치를 지키고 기존의 법원칙과 판례에 따른 것이라 해도 공동체에 그 이상의 부작용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면 심사숙고하는 게 옳다"면서 "당장은 큰 영향이 없을지라도 장기적으론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켜 투기와 부동산 값 앙등을 다시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종부세가 유명무실하게 됐다는 지적은 종부세를 반대하는 쪽이나 찬성하는 쪽이나 마찬가지다. 주목할 부분은 종부세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유명무실하게 됐으니 아예 없애자고 나서는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헌재를 비난하는데 그칠 뿐 정작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논리를 빌리자면 세대별 합산 과세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이 바로 '코끼리'다. 종부세가 (일부) 위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종부세의 유명무실화를 피할수 없다. 헌재의 결정이 잘못됐다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또는 헌재 재판관들이 모두 '강부자'라고 아무리 비난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세대별 합산 과세에 일부 법리적 오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이를 두고 논쟁을 벌여봐야 결코 이길 수 없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헌재와 강부자, 보수 언론의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헌재가 종부세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세대별 합산에 문제가 있으면 인별 합산으로 전환하돼 실효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면 된다. 주거 목적의 장기 보유자에게 종부세를 부과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면 헌재가 권고한 것처럼 예외조항을 적용하거나 세율을 낮추거나 과세 기준을 조정해주면 된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가 종부세가 유명무실하게 됐다, 껍데기가 됐다고 인정하고 개탄하는 것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길이다.

종부세를 폐지하면 부동산 가격이 오를 거라는 어설픈 비판 역시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이 역시 "세금 폭탄"이라는 보수 진영의 프레임에 갇히는 꼴이다. 왜 세금으로 부동산 가격을 잡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종부세가 언제부터 부동산 가격을 잡는 세금이었나. 대부분 언론이 간과하고 있지만 종부세는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하기 위한 세금이다. 종부세의 취지는 불로소득을 철저하게 공공부문이 환수하고 이를 공공적인 목적에서 활용하자는 것이다. 불로소득을 환수하면 철저하게 실수요자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재편되고 자연스럽게 가격 거품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종부세를 폐지하면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다"는 한겨레의 주장은 맞는 말이지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주장의 강도는 떨어지겠지만 종부세를 폐지하면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없게 되고 그만큼 집없는 사람들이 차별받게 된다고 주장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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