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이사회가 열린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 경찰력이 동원돼 정연주 사장 해임안이 의결된 데 이어 11일 대통령이 이 안에 서명하면서 끝내 정 사장 제거 계획이 현실화되자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박승규 본부장)에 대한 책임론이 일고 있다.

▷‘정연주 퇴진-낙하산 반대’ 모순된 원칙=KBS본부는 시종일관 정연주 사장의 퇴진과 낙하산 사장 반대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원칙을 세워놓고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움직임에 대응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김금수 전 이사장에 대한 정 사장 사퇴 요구 △감사원 특별 감사 △박재완 수석의 ‘KBS사장은 정부 국정철학 구현하는 사람이 돼야’ 발언 △대통령에게 KBS 사장 해임권이 있다는 발언 등 전방위적인 정 사장 몰아내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도 이를 규탄하는 성명이나 기자회견을 여는 수준의 대응밖에 할 수 없었다. 박승규 본부장 스스로도 ‘정부의 정 사장 몰아내기 움직임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원칙적으로 잘못이라는 지적은 할 수 있으나 ‘정연주 지키기’는 할 수 없다”며 “정 사장 스스로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KBS 사내에 18년만에 진입한 경찰병력이 김현석 기자협회장을 끌어내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사회 당일 소극적 행보?= 지난 8일 감사원의 정 사장 해임제청안이 부당하다며 이사회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원들이 이사회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사전에 난입한 사복경찰들에 의해 끌려나오고 짓밟히는 사태가 빚어졌을 때 KBS본부가 취한 태도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박승규 본부장은 12일 발행된 특보에서 “30여 명의 노조 비대위원들이 온몸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당일 현장을 지켜본 이들 중 조합 집행부 간부가 결사적으로 막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내게시판(KOBIS)에는 “노조는 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 중견 PD는 “방송사가 유린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할 때 왜 더 강경하게 막지 못했느냐”고 분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특보에서 “당일 어떻게 보면 노동조합 입장은 어정쩡했다”며 “정연주가 한 순간이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는 조합원들의 기대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정연주 사퇴’-’정권의 강제퇴진 저지’ 무엇이 우선인가=무엇보다 언론계와 정치권, 시민들은 정연주 사장 개인의 문제점보다 ‘정권에 의한 사장 몰아내기에 따른 공영방송 장악 저지’가 우선이라고 지적해왔다. 두 달 넘게 KBS 앞을 지켜온 촛불시민들도 “정연주가 좋아서가 아니라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저지해야겠기에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KBS본부는 두 가지의 가치 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판단 자체를 하지 않았다. 둘 다 중요하다고만 반복했다. 이런 문제의식 탓에 정권의 어떤 무리수에도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또한 시종일관 정연주 사장 사퇴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적자경영’과 ‘CEO능력 부재’였다. 회사의 부실경영에 대한 비판은 노동조합으로서 제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방송사, 특히 지난 87∼88년 언론사 노조가 출범하게 된 정신은 공영방송을 지키고 공정보도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조가 ‘적자경영 사장 반대’라는 구호를 우선시한 게 적절한 태도였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촛불시민들 다수는 이런 KBS본부의 태도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어용노조’라고 비판해왔다.

▷촛불 배후론=지난 6월11일 이후 두 달 넘게 촛불집회를 벌인 시민들에 대해 “정연주를 둘러싼 일부 사내 정치 세력들이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 순수한 촛불의 의미를 오도하려 한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봐 넘길 수 없는 사안”(6월13일 성명)이라고 ‘사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촛불시민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이를 두고 한 PD는 “정권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빠’로 폄훼하고 ‘외부세력과 연계’ 운운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지적했다.

▷사원행동 출범 외면=이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 정 사장이 해임되자 KBS 직능단체와 일부 조합 지부장, 운영위원들이 나서서 지난 11일 노조를 제외한 별도의 기구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를 설립했다.

별도의 기구이지만 이들은 노조에 대해 함께 싸울 것을 촉구했지만 박승규 본부장은 “우리 내부의 분열이 공영방송을 집어삼키려는 세력들에게 어떻게 악용될지 모른다”며 “노조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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