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리거나 낮추면서 경기의 흐름과 물가를 조절한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풀어 환율을 인위적으로 붙들거나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규모의 세금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은의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한다. 대출 이자가 올라 부담이 늘기도 하고 물가가 올라 고통 받기도 한다. 한은은 집값 거품을 부풀리거나 꺼뜨릴 수도 있고 주식 시장에 유동성을 불어 넣거나 줄일 수도 있다.

문제는 국민들이 한은의 정책에 대해 거의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하고 당연히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다는데 있다. 과연 한은의 정책은 언제나 신성 불가침한 것인가. 한은은 늘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한은이 결정하면 국민들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 유동성이 급증하는 추세지만 한은은 아직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유동성 지표. / 한국은행.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11일 오전 콜금리 목표를 5.0%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8월 콜금리 목표를 0.25%포인트 인상한 이후 두 달째 동결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은의 이번 콜금리 동결과 관련해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흔들리는 물가와 급증하는 유동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물가나 유동성을 생각하면 금리를 한 차례 더 올리는 게 맞지만 문제는 환율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 금리를 동결하는 추세라는 것도 한은을 압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경우 원화 강세를 부추겨 환율이 900원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 한은은 결국 환율 안정을 선택했다.

   
  ▲ 이성태 총재가 11일 오전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지금은 물가 상승률이 2% 초중반이지만 연말로 갈수록 2% 후반으로 가고 내년 상반기까지는 조금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원유, 원자재 가격 불안요인이 있어 물가 상승률이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2.5~3.5%를 생각하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밝혔다.

유동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직은 유동성 증가속도가 뚜렷하게 둔화되는 기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면서 다만 "앞으로 조금 더 감속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은은 금통위 회의를 하루 앞둔 10일, 시중 유동성이 크게 늘어났다는 자료를 발표한 바 있다. 한은이 발표한 '8월 중 통화 및 유동성 지표 동향'에 따르면 8월 말 광의유동성 잔액은 1972조3000억 원으로 7월 말보다 20조9000억 원(0.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7월 증가액 1조7000억 원보다 10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 한은의 금리 동결은 세계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추세인데 우리만 역주행을 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 비교.  
 
올해 월별 광의유동성 증가액은 4월 13조9000억 원, 5월 25조3000억 원, 6월 35조 원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가 7월 크게 감소한 후 다시 큰 폭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같은 날 발표한 '9월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9월에 7조7908억 원 늘어 8월(3조9465억 원)보다 97%나 늘어났다. 유동성이 넘쳐나는 상황이고 좀처럼 줄어들 추세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급증하는 유동성이 물가를 자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한은은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은의 이번 금리 동결은 유동성 축소와 물가 안정 보다는 환율 안정을 선택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기업들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우려도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뜩이나 국제 유가와 국제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어 물가 급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한은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키움닷컴증권 유재호 연구원은 "시장은 금리 동결을 원하고 있지만 유동성 증가가 지속되고 있고 세계적으로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 때문에 물가에 대한 부담감도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금리 인상압력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한은의 금리 정책이 시장의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은 한은이 늘 시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은은 자본시장 참여자들과 수출기업들의 이해를 충실하게 대변해 왔다. 한은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감시와 비판, 한은의 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가 필요할 때다. 지금 시점에서 금리 동결이 최선의 판단일 수도 있지만 핵심은 소수 정책 입안자들의 판단에 한 나라의 경제 전반이 휘둘리는 시스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은도 비판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 한은의 금리 동결은 세계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추세인데 우리만 역주행을 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 비교.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