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금융연구원이 흥미로운 보고서를 냈다.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주식 소유구조가 공개된 91개 은행을 조사했더니 영향력 있는 주요주주가 없는 경우가 52.7%인 48개로 나타났다. 이 은행들은 최대주주 지분율이 10% 미만이었다. 이른바 '주인 없는 은행'들이다. 5% 미만인 경우도 15.4%나 됐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25% 이상인 은행은 26.4%, 10~25%인 은행은 20.9%로 나타났다.

이병윤 연구위원은 '세계 100대 은행의 소유형태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최대주주 지분율이 25% 이상으로 은행을 완전히 지배하는 지배주주가 있는 은행들은 정부계 은행이거나 금융이 그다지 발달했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 소유 은행들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은행에 있어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은행, 최대주주 영향력 행사 상대적으로 많아

우리나라의 경우는 10개 시중은행 가운데 최대주주 지분율이 10% 이상인 은행이 우리은행과 외환은행을 비롯해 SC제일은행, 한국씨티은행, 부산은행, 전북은행 등 6개다. 5% 미만인 은행은 하나도 없다. 이 연구위원은 "세계 100대 은행들과 비교해 보면 최대주주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고 설명했다.

8일 조간신문에서 이 보고서를 인용한 곳은 세계일보와 한겨레, 한국일보 밖에 없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 또는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 한겨레 10월8일 17면.  
 
금산분리 원칙은 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을 지배하면 특정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하고 자금을 빼돌리며 금융기관이 부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만든 원칙이다. 금산분리 원칙의 폐지 또는 완화는 재벌 대기업의 은행 진출과 직접적으로 맞물린다. 더 직접적으로는 '삼성은행'을 허용할 것이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대선 앞두고 금산분리 폐지 주장 봇물

금융연구원의 보고서는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 또는 완화하자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산업자본이냐 아니냐를 떠나 애초에 은행을 특정 자본이 지배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야기다. 매일경제를 비롯해 일부 신문들은 오히려 이와 상반되는 주장을 싣고 있다.

   
  ▲ 매일경제 10월8일 14면.  
 
매경은 8일 14면 <"산업자본 은행지분 4% 제한 완화해야">에서 민간금융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인용, 금산분리 원칙을 유지하되, 산업자본의 4% 지분 제한을 완화하라는 주장을 실었다. 매경은 "국내 산업자본이 은행 주식을 사지 않다보니 외국인 지분율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문제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다보니 경영권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덜 매서워 전문경영인이 대기업 오너처럼 은행 경영을 좌지우지 하는 폐해도 생겼다"고 덧붙였다. "금산분리가 완화되지 않은채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매각이 추진될 경우 국내 금융자본의 여력이 부족해 이들 은행이 외국계로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머니투데이도 8일 8면 <기로에 선 금산분리>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금산분리 폐지 또는 완화 주장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 매일경제 10월8일 8면.  
 
파이낸셜뉴스는 8일 8면에서 아예 "산업자본이 가세해야 글로벌 투자은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는 "현재 한국 금융산업은 시스템적으로 경영의 독립성과 건전성이 확립돼 있어 사금고로 전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금산분리 완화 또는 폐지의 부작용이 있다면 보완책을 추가로 마련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 헤럴드경제 10월8일 3면.  
 
헤럴드경제는 뜬금없이 지난달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언을 인용해 "규제완화는 선진국이 하는 것 보면 다 나와있다"며 "공격적으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8일 3면 <"심리적 기업 압박부터 풀어라">에서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에 걸림돌이 되는 출자총액제한제, 금산분리제라는 독소조항을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 선제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는 재계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재벌 사금고 전락할 가능성 없다"

한국경제는 8일 4면 <금산분리 등 미국에는 없는 규제/FTA 시대 한국기업 발목 잡는다>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주장을 인용, "이런 규제는 삼성 등 일부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이 적대적 인수합병에 노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비은행 금융기관의 자산운용을 제약해 금융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 한국경제 10월8일 4면.  
 

전경련은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금산분리 규제가 미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규제라고 지적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세계 100대 은행과 보험사 중 산업자본이 지배주주인 경우는 각각 4개, 8개에 불과하다. 또한 이 100대 은행과 보험사의 지분을 가진 개별회사들 중 90%가 우리나라와 같이 4% 미만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금산분리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동걸 원장은 5일 세미나에서 "우리나라도 은행업에 대해서만 막고 있지 제2금융권은 산업자본이 거의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나라는 산업자본의 금융 소유가 심한 편에 속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원장은 "은산분리를 허물자는 주장은 축구선수가 야구를 못하게 한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은 논리에 기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국내 주요 증권사나 보험사는 산업자본의 소유 아래 있는 상태다. 이 원장은 "제발 은행을 인수하는 증권사나 보험사가 나왔으면 하는 게 희망사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이 전자그룹과 금융그룹으로 나눠진다면 삼성 금융그룹이 얼마든지 은행을 소유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금산분리 폐지하는 대통령 뽑자"

해묵은 논쟁을 경제지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것은 최근 대선 국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경제는 9월19일자 사설에서 노골적으로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이낸셜뉴스는 8일 "금산분리 원칙의 고수 여부가 사회 전반에서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분위기를 잡고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발언을 옮겨 보자.

"금융과 산업자본의 관계는 지난 1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외국 기업들은 펀드를 만들어 은행을 인수했다. 이제 금산분리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됐다." (이명박, 5월7일)

"외국자본은 다 들어오는데 외국자본에게는 자율을 주고 우리 기업에는 자율을 안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외국인에게는 의결권을 10%까지 허용하는데 국내 기업에게는 4%밖에 허용하지 않는 것은 대표적인 역차별이다." (박근혜, 4월16일)

두 사람의 주장은 언뜻 솔깃하게 들리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모순투성이다. 국내 자본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논리는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 또는 완화하자는 주장의 대표적인 근거다.

삼성은행 바람잡기?

먼저 국내자본이나 외국자본이나 금산분리 원칙의 적용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흔히 론스타펀드의 사례를 들어 국내자본에도 은행의 소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론스타의 경우는 불법 사례이다. 론스타처럼 국내자본에도 은행 소유를 허용하자고 주장할 게 아니라 불법매각을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바로 잡자고 주장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대부분 나라들이 예탁자 보호를 위해 금산분리 원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100대 은행 가운데 산업자본이 지배하는 은행은 4개 밖에 안 된다. 경제지들의 금산분리 폐지 또는 완화 주장은 결국 '삼성은행' 설립을 위한 바람잡기일 가능성이 크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금산분리 원칙과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되어 있지만 특유의 승수효과로 인하여 적은 자본으로도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민은행은 자본금이 1조7천억원에 불과하지만 금융소비자(국민)의 저축으로 구성된 자산이 207조원으로 국민경제 GDP의 22.4%에 육박한다. 은행 하나가 국민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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