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의 기업환경 순위에서 우리나라가 178개국 가운데 30위를 차지했다. 1위는 싱가포르, 2위는 뉴질랜드, 3위는 미국이다. 이 소식을 국내 언론에서는 연합뉴스가 가장 먼저 보도했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비중있게 받아썼다. 국내 언론은 기업환경이 오히려 악화됐다며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가 주관한 이 조사는 개발도상국의 기업환경 개선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것일 뿐 국내 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순위 자체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외신을 뒤져봐도 개발도상국을 제외한 OECD 국가에서 이 기사를 비중있게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국내 언론은 순위가 지난해 보다 7위나 떨어졌다는 데 주목하고 규제 완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번 조사는 창업과 폐업, 고용, 세금, 인허가, 소유권 등기, 투자자보호 등 10개 분야에 걸쳐 순위를 매기고 이를 다시 평균을 내는 방법으로 순위를 정했는데 국내 언론이 요구하는 규제완화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항목들이다.

매일경제는 “정부가 더 늦기 전에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규제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며 “말뿐인 규제 개선이 아니라 혁명적인 사고 전환을 통해 기업 천국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경은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일보는 “규제완화를 공격적으로 해야 선진국으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국민일보는 고용분야 순위가 131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태백, 사오정 등의 자조적 용어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러나 고용분야 순위는 취업률이나 실업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퇴직금을 해고비용으로 분류하는 등 조사방법에도 문제가 많지만 이를 지적하는 언론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포르투갈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유효한 개혁을 가장 많이 한 반면 한국은 기업 경영 환경을 낫게 하는 개혁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개혁을 가장 많이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지난 1년 동안 규제개혁 사례가 한 건도 보고된 바 없다는 사실도 빠뜨렸다.

국내 언론의 주장은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고 세금을 깎아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유연성은 우리도 세계적인 수준이고 가뜩이나 이번 조사에는 비정규직이 전혀 고려돼 있지 않다. 세금 역시 OECD 평균 보다 낮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수익대비 세금 비율은 34.9%로 OECD 평균 46.2%보다 낮다. 국내 언론이 요구해왔던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나 금산분리 완화 등도 모두 이번 조사결과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오히려 투자자 보호 분야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된 항목들은 국내 언론이 그동안 강조해온 기업하기 좋은 환경과는 배치되는 부분도 많다. 대주주의 영향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또는 주주들이 이사회 의장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등의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전체 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은행은 공시를 강화하고 내부자 거래를 엄격히 처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