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저녁 서울 강남구 대치동 그레텍 본사 강당에서는 한국 정치사상 그리고 언론사상 초유의 실험이 진행됐다. 대선 예비 후보로 나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50여명의 블로거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세 시간 가까이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았다. 간담회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합동 기자회견과 비슷했다. 태터앤미디어와 블로터닷넷이 공동 주관한 이날 행사는 대선 후보 릴레이 간담회의 첫 번째 순서였다.

이날 모임이 기자회견과 다른 점이라면 우선 참석자들이 기자가 아니라 일반 유권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선거법에 따르면 대선 예비 후보가 유권자들 모임에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면 사전 선거운동으로 선거법 위반이 된다. 그 대상이 일반 유권자들이 아니라 블로거들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선거관리위원회는 만약 블로거들이 인터넷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면 기자회견 형식의 모임이 가능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 태터앤미디어와 블로터닷넷 공동 주최 대선 주자 블로거 간담회. / 곰TV 캡쳐.  
 
이 행사를 처음 준비했던 태터앤미디어는 블로그 저작도구인 태터툴즈를 만드는 회사다. 국내 설치형 블로그의 90% 이상이 태터툴즈를 쓰고 있을 정도로 대중화된 저작도구다. 블로터닷넷은 블로거와 기자(리포터)를 합성해 만든 말이다. 1인 미디어 공동체를 표방한 이 사이트는 문화관광부에 인터넷 신문으로 등록돼 있다. 태터앤미디어는 블로터닷넷과 공동으로 행사를 주관해 선관위의 규정을 피해나갈 수 있었다.

쌍방향 미디어... 민의가 곧 언론이 되는 시대

블로거들은 일반 유권자들 입장에서 질문을 던졌고 문 후보의 답변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기록했다. 이날 모임에서 블로거들은 화자면서 동시에 기자가 됐다. 사회를 맡은 김상범 블로터닷넷 대표는 "50개의 언론사 사장들이 모였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굳이 정의하자면 언론이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가 바로 언론이 되는 실험인 셈이다. 이날 모임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인 곰TV를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

오마이뉴스와 곰TV를 통해 중계되는 동안 화면 한쪽에는 네티즌들의 댓글들이 계속 올라왔다. 태터앤미디어 관계자는 행사 끝 무렵 댓글들을 정리해 문 후보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완벽한 쌍방향 미디어를 구현한 셈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취업난으로 고민하는 대학생과 내년 봄 출산을 앞둔 예비 엄마, 30년 장기 대출로 최근에 아파트를 구입한 주부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 누구라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이 블로그를 인터넷 신문에 등록하기만 하면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고 정치인을 인터뷰하거나 간담회 등을 개최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굳이 블로터닷넷이 아니라도 미디어다음 등 포털 사이트의 블로거 기자단에 참여해 활동하는 방법도 있다. 분명한 것은 기자와 블로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미디어를 소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 열렸다는 이야기다.

태터앤미디어와 블로터닷넷은 릴레이 간담회 두 번째 모임으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와의 모임을 이달 중순께 계획하고 있다.

   
  ▲ 태터앤미디어와 블로터닷넷 공동 주최 대선 주자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한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 / 곰TV 캡쳐.  
 

아래는 문국현 간담회 주요 내용. (이정환 기자는 이날 기자가 아니라 블로거 자격으로 참석했고 이날 간담회 내용 역시 기사 형식이 아니라 간담회 후기 형식으로 기록하기로 한다.)

문국현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기업 혁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IMF 외환위기에서 유한킴벌리를 건져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날 블로거 간담회는 그가 과연 준비된 대통령인가 아니면 대통령을 꿈꾸는 성공한 기업가일 뿐인가를 가늠하는 자리였다. 갑작스럽게 올라간 지지율에 걸맞지 않게 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문 후보의 지지자들이 상당수 모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상당수 블로거들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그의 역량을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문 후보는 그때마다 능수능란하게 받아치면서 원칙과 비전을 거듭 강조했다. 총평을 내리자면 신념은 확고하지만 여전히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둔감해 보인다는 것, 원칙은 바르지만 그 원칙을 구현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힐 거라는 것 정도다.

"저 임금과 저가 생산으로는 답이 없다"

문 후보는 비정규직을 반대했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찬성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교육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여서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것이 그의 기업혁신과 국가 개조론의 핵심이다. 그는 유한킴벌리의 위기 돌파 메커니즘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먹혀들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확신이 지나친 탓인지 핵심을 벗어난 답변도 많았다.

- 만약 당신이 사양산업, 이를테면 섬유공장의 CEO라고 생각해 보자. 업종 변경을 하거나 폐업을 해야 할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이탈리아는 우리보다 섬유산업이 더 낙후돼 있었지만 섬유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섬유산업에 디자인을 도입했다. 우리가 한 마에 1.5달러에 파는 섬유를 이탈리아는 3달러에 판다. 낙후된 산업을 버리자는 건 신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다. 나는 전통산업을 첨단 기술로 재창조하자고 주장한다."

기술혁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문 후보는 "하면 된다" 이상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견해 역시 마찬가지다. 문 후보는 "법으로 비정규직을 막기는 쉽지 않다"며 "1년 이상 있으면 정규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는 비정규직이 4%밖에 안 된다"며 "왜 우리나라는 55%나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면 되는데 왜 비정규직을 쓰느냐는 논리다. 단순 명쾌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불법 과로를 줄이는 게 핵심이다. 저임금과 저가상품으로 가면 답이 없다. 2천원짜리 넥타이를 만들지 말고 3만원짜리 넥타이, 10만원짜리 넥타이를 만들자는 거다. 프리미엄 시프팅이다. 중소기업 소득이 늘어나면 내수 시장도 확대 된다. 정부 주도로 5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좋은 일자리가 넘쳐나는데 누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려고 하겠는가. 비정규직을 쓰려고 해도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 만들면 되는데 왜 비정규직 쓰나"

8% 성장이 가능하다는 주장 역시 구체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문 후보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겨냥, "한나라당의 7% 성장은 잠재성장률 4%에 건설투자 3%를 감안한 것인데, 건설투자 3%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말하는 것도 같다. 잠재성장률은 4%다. 부동산 투기는 없고,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높여 2%를 얻는다. 부패가 없어지고 외국인 직접투자가 200억달러 들어오고 FTA까지 체결하면 1%를 또 얻는다. 여기에 북한과 미국이 수교되고 환동해 경제협력을 구축하면 또 1%, 그래서 8%가 된다."

FTA에 대한 중도적인 입장은 그가 기업가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개방과 통상정책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되 보완 대책을 충분히 수립한다는 이야기다.

- FTA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 당신의 FTA는 노무현의 FTA, 이명박의 FTA와 어떻게 다른가.
"서두르더라도 완벽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미국 기업이 한국 기업을 소송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거나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농업을 포기한 부분이 아쉽다.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그걸 통해서 중국과 일본이 한국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미국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게 만들었고 북한과 미국의 수교를 끌어낸 것들을 보면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게 많다고 본다."

"애 낳기 좋은 사회 만들자"

국민연금에 대한 입장도 흥미롭다. 국민연금 기금의 고갈 문제, 과잉적립의 문제, 그리고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역시 명쾌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안이었다.

"나는 인구 5천만을 유지할 계획이다. 지금 국민연금 재정추계는 인구가 2600만명까지 줄어든다는 걸 전제로 한다. 결혼하면 1명 낳거나 낳지 말거나 결혼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왜 결혼을 못하고 왜 애 낳기를 두려워하는지를 알아야 처방이 나온다. 보육을 지원하고 공교육을 강화하면 왜 2명, 3명씩 안 낳겠느냐. 출산율이 늘어나면 국민연금 역시 쉽게 해결된다."

당선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미 싸움이 끝났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제 대 경제의 구도가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이명박 후보를 제외한 다른 후보는 낄 여지가 없다는 것. 이명박과 문국현의 2강 구도가 굳어지면 국민들이 결국 자신을 선택할 거라는 이야기다.

"나 같으면 운하 만들 돈으로 중소기업 월급을 2배로 올려주겠다. 되지도 않는 운하로 온 땅을 파헤치겠다는 건데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거라고 본다."

문 후보는 "기득권 계층의 저항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 언론관 역시 명확히 잡혀있지 않다는 인상을 줬다. "지금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10월 중순 이후 10% 이상 지지율을 얻으면 방송에서 다루기 시작할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문 후보의 이런 순진한 언론관은 이명박 후보 등과 본격적인 경쟁 구도에 나설 경우 보수 언론과의 관계에서 난항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문 후보는 거듭해서 '착한 기업'의 원칙을 이야기했다.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기업이 아니라 일자리를 주고 교육과 자기 계발의 기회를 주고 한 나라의 성장을 주도하는 기업혁신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의 장밋빛 공약은 새롭고 참신하면서도 언뜻 1970년대의 이데올로기의 변주처럼 들리기도 했다.

성공한 기업가, 성공한 정치가도 될까

그는 시종일관 정답을 이야기했다. 그는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정직한 기업인의 이미지를 확보했고 그의 그동안 이력으로 볼 때 그런 이미지는 상당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문 후보가 유권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려면 실현 가능한 단계별 전략을 제시하고 설득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막연한 이상에 모험을 걸기에 우리 국민들은 여유가 많지 않다. 80일 가까이 남은 선거 국면에서 얼마나 공고히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느냐도 관건이다.

   
  ▲ 태터앤미디어와 블로터닷넷 공동 주최 대선 주자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한 블로거들 / 곰TV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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