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가 생전에 결성했던 농촌단체 ‘월진회’가 정통성 시비에 휩싸였다.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1945년부터 운영되어온 월진회쪽 관계자들이 13일 2000년 서울 양재동에 법인으로 설립된 월진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또 서울 월진회 윤주 부회장의 부친 윤영석(윤 의사의 친동생·작고)씨의 독립운동 공훈기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 윤규상 월진회장(충남 덕산) ⓒ조현호 기자  
 
충남 덕산의 월진회 윤규상(84)회장은 이날 2000년 12월 설립된 서울의 월진회(회장 황의만, 부회장 윤주)에 대해 윤 의사가 생전에 만들었다가 사후 계승된 덕산 월진회와 전혀 무관한 단체라고 주장했다.

윤 회장은 “지난 2001년 7월25일 문화관광부가 ‘황의만 회장의 월진회 법인허가 취소 청원 회신’으로 보내온 공문에 따르면 ‘(서울 월진회의) 목적사업이 △청소년 문화활동 지원사업 △소외 불우청소년을 위한 문화 향유사업 △청소년 수련활동 지원사업 등 청소년 관련법인 요건을 갖춰 설립허가를 한 것’이라고 되어 있어 윤 의사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고 윤영석씨가 건국포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근거가 된, 독립운동 공훈기록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 윤규상 월진회장이 고 윤남의(영석) 씨의 독립운동 공훈기록에 문제가 있다며 문서를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조현호 기자  
 
윤 회장은 “윤영석씨 기록상 △1926년에 예산지역 농촌계몽 부흥운동 △1930년엔 윤봉길 의사 망명 후부터 월진회를 이끌고 토론회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돼있으나 당시 윤씨는 각각 9살, 13살로 이 같은 운동을 하고 이끌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윤영석씨가 1931∼1932년 독서회 사건 연루가 두려워 피신했으며 1933년 이후 선의라는 승명으로 1943년까지 출가 은거했다’는 공훈기록도 당시 예산군 덕산면 목바리 사람들의 증언과는 차이가 많다”며 “윤씨는 1932년 보통학교 졸업 후 틈틈이 수암산으로 금을 캐러 다녔으며 이듬해 결혼한 뒤 1935년엔 6촌형인 윤명의씨가 경영하던 동일제과에 취업해 1943년까지 근무했다”고 주장했다.

윤 의사의 6촌 동생 윤재의씨도 이날 “서울의 월진회가 윤 의사 기념사업을 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며 “12살부터 윤영석씨와 생활했으나 윤씨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양심선언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윤규상 월진회장 ⓒ조현호 기자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고 윤영석 씨의 아들 윤주씨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답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최정석 월진회 사무국장도 “월진회는 윤 의사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의식 고취사업 및 청소년 사업을 하도록 돼있다”며 “우리야말로 1947년 이후 2000년 설립허가를 받을 때까지 윤 의사 기념사업을 이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윤규상, 윤재의씨 등이 월진회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반박했다. 또 공훈기록에 나온 독립운동 사실이 허위라는 주장에 대해 윤 부회장과 최 국장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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