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기대 판결, 훼손될 명예가 있나"
"권력에 기대 판결, 훼손될 명예가 있나"
한겨레 전종휘 기자 "논란 삼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진실화해위)가 분석한 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사 명단의 실명공개 방침에 대해 조중동을 비롯한 신문들이 30일자에서 일제히 '명예훼손' '정치적 악용 소지' 등을 우려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날 판사 실명 전체를 공개한 한겨레 기자는 공개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당시 판사들의 실명은 대외비나 보안사항도 아닐 뿐 아니라 판결문만 봐도 충분히 실명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언론의 우려가 오히려 지나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조중동 "명예훼손·법질서 파괴·정치악용" 한목소리

이날 보도한 조중동과 한국일보 세계일보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당시 긴급조치에 따른 법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실정법을 지키려 했던 판사들을 이제와서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흔들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1월30일자 6면  
 
조선은 6면 머리기사 <'긴급조치 위반' 판결 판사 500명 공개 논란>에서 "법조계에선 '법치주의와 판사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며 현직 판사와 이석연 변호사의 말을 빌어 "판사 명단이 공개되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포퓰리즘으로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또다른 인격권 침해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중앙일보 1월30일자 6면  
 
전날 가장 먼저 긴급조치 판사 명단 공개를 문제삼았던 중앙일보도 6면 <대법원 "공개 땐 정치적 오염 우려">에서 대법원이 29일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현 정권보다는 차기 정권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면서 "정치적 악용의 소지가 있을 때 하기는 어렵다. 이 일로 사법부 내부의 과거사 정리 논란이 증폭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의 말을 전했다.

   
  ▲ 동아일보 1월30일자 5면  
 
동아일보는 5면 <과거사위, 긴급조치 판결한 판사 실명공개 추진/일부위원 "논의된 바 없다" 이의>에서 긴급조치 판사 명단을 공개한다는 방침을 밝혔던 진실화해위 내부에서조차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법원 관계자의 말을 빌려 "단지 긴급조치 시절 재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긴급조치 판사'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또다른 포퓰리즘이 될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국·세계도 명단 공개 반대

한국일보와 세계일보는 전날 중앙일보처럼 사설을 통해 공개 반대입장을 밝혔다.

한국은 <긴급조치 판사이름 공개는 잘못된 발상>에서 명단 공개가 명분과 실리 모두 없는 일이라면서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사들은 악법이긴 하나 어쨌든 당대의 실정법에 따라 판결한 법관들이다.…그런 식으로 논리를 확장할 경우 당시 법 체계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유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국민은 별로 없다"고 주장했고, 세계일보도 사설 <'긴급조치사건', 판사 이름 공개말라>에서 실명 공개 방침에 대해 "과연 이 나라에 법이 살아있는가를 의심케하는 충격적 조치가 아닐 수없다"며 "과거사위의 명단 공개 방침은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는 9면 기사에서는 "판사들의 실명이 공개될 경우 당사자들의 도덕성과 명예가 크게 훼손될 것으로 보여 논란이 예상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들 신문의 이런 우려는 이미 전날부터 연합뉴스 MBC 등을 통해 일부 판사들의 실명이 조금씩 공개된 데다 한겨레가 30일자에 당시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판결한 판사 492명 명단을 입수해 모두 공개해 의미가 없어졌다.

한겨레 전종휘 기자 "논란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의도"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입수, 공개한 한겨레 전종휘 기자는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판결문이 기밀문서도 아니고 대법원 도서관에 가면 충분히 검색할 수 있는 것임에도 공개 자체를 두고 논란을 확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며 "판결문은 국록을 먹는 판사의 대국민 공공서비스인데 그 판사의 이름을 공개하는 게 논란이 될 이유가 뭔가"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 1월30일자 1면  
 
전 기자는 마녀사냥이라는 주장에 대해 "당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절반 가까이가 박정희를 비판했거나 정부를 비난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는 혐의였다"며 "이것이 실정법 위반이라고 했던 것은 자연법상에도 맞지 않고, 양식있는 사람이 볼 때 상식에도 어긋나는 법이었다. 이같은 법에 의존해 판결을 내린 판사는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아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마치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언론이 대법원 관계자 말을 인용해 공개가 논란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전 기자는 "이를 공개 논란으로 확산시키는 것 자체가 떳떳치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라며 "언론들이 법원쪽 의견만 듣고 그들의 입장이 진실한 것처럼 대변한 것은 온전치 못한 태도다. 검찰과 법원이 갈등할 때는 검찰 말만 듣고 쓰더니 이제는 법원 얘기만 잔뜩 기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폭력에 기대 판결해놓고 명예훼손 걱정하다니…"

판사의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 기자는 "긴급조치라는 국가폭력에 의에 만들어진 법에 기대 판결한 것이야 말로 명예가 훼손될만한 일"이라며 "당시 그런 판결을 해놓고 지금 와서 명예훼손 주장을 펴는 것은 공직자로서 떳떳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한편 한겨레는 입수한 보고서를 분석해 1면에 당시 판결을 했던 판사들의 반성과 소회를 담아 기사화했고, 4면에는  당시 판결과 판사 명단 전체를 공개했고, 현재 법원 고위직만 12명이 포함돼있다는 내용등을 보도했다.

한겨레는 명단 공개의 이유에 대해 "긴급조치로 옥살이한 절반 가까이가 모진 고통을 겪었음에도 이를 '어쩔 수 없느 시대상황' 탓으로 돌리고, (우리도) 이를 받아들인다면 후손들에게 도덕적 허무주의를 물려주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